한국일보 칼럼

명지대 앞 북카페 (2008 9월 3일)

divicom 2009. 10. 31. 10:14

대학이 개강을 하니 동네가 살아납니다. 중년의 조바심을 아랑곳 않고 천천히 흐르던 젊은 인파가 아예 서버립니다. 유명한 프랜차이즈 도넛 가게가 ‘그랜드 오프닝’을 하고 있습니다. 오색 풍선이 재색 보도에 색을 입히고, 주홍과 빨강으로 장식한 가게 안에도 웃는 얼굴이 가득합니다. 이 가게가 누구의 무덤 위에 세워졌는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3년 전 겨울, 마음이 새 동네에 정붙이지 못할 때면 언제나 이리로 발을 옮기곤 했습니다. 건물마다 1개에서 4개에 이르는 분식집들이 텅 빈 채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 지나치기 괴로웠지만, 이곳에 이르면 오래 살던 동네에 온 듯 마음이 문득 편안했습니다.

 

한참 닦지 않아 선팅을 한 것처럼 보이는 유리창, 책을 들여다보기엔 너무 어두운 조명,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처세술 책들과 약간의 문방구류, 펼친 노트만한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하고 앉아 있는 주인. 그래도 책방은 책방이라 먼지 쌓인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다보면 가슴에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고, <푸슈킨 비밀 일기>의 몇 구절이 떠올라 혼자 웃기도 했습니다.

 

“책장을 여는 건 여자의 다리를 벌리는 것과 같다. 지식이 내 눈 앞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든 책들은 각각 제 나름의 냄새를 지니고 있다. 책을 하나 열고 숨을 들이쉬면 잉크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책마다 그 냄새가 다르다... 아무리 바보스러운 책이라도 처음 그 책을 여는 순간엔 내게 기쁨을 준다.” 평생 뭇 여성을 사랑하다 연적과의 결투에서 얻은 상처로 사망한 푸슈킨다운 비유입니다.

 

-- 문 닫는 가게들 --

 

우리 동네에서 사라진 건 그 서점만이 아닙니다. 김밥과 떡볶이에서 해장국까지 수십 가지 음식을 팔던 꼬마 식당들, 치킨 집, 생맥주집, 아이 옷집, 어른 옷집, 비디오와 책 대여점, 헤어숍, 가방 가게, 꽃집, 목욕탕까지, 기억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집들이 사라졌습니다.

 

경제전문가들은 나라가 잘 살게 되면 자영업자의 수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1인당 GDP가 1만 달러 이하일 때는 자영업자의 비율이 20 퍼센트가 넘지만, GDP가 2만 달러쯤 되면 20 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GDP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자영업자의 비율이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결국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문제는 가게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정부나 언론도 열심히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특수법인으로 설립된 소상공인지원센터가 있어 자영업컨설팅을 해준다고 하지만 예산 때문에 도움 받을 사람의 수를 제한합니다. 홈페이지에는, 올해 3월부터 “예산 소진시”까지 자영업컨설팅 신청을 받는다는 소식 몇 줄 건너, 7월 3일 18시 현재 신청건수가 2008년도 정부지원 예산범위를 초과하여 신청을 마감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정부의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건 개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일깨우는 겁니다. 무수한 분식집들을 보고도 또 하나를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키고, 이 나라 자영업의 어두운 미래를 경고하며 맞춤한 중소기업에 취업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것이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정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자영업의 앞길이 아무리 험해도 꼭 그 길을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명지대 앞으로 오십시오. 분식집이나 가방 가게 말고 책방이나 북 카페를 하십시오. 반경 몇 킬로 안에 서점다운 서점 하나 없고 북 카페도 하나 없으니 분명히 잘 될 겁니다. 주인이 텔레비전 대신 책을 보고, 가끔 유리창도 닦고 하면 말입니다. 겨울 방학쯤이면 저 도넛 가게 때문에 시름시름하다 문 닫는 집이 서넛은 나올 테니 그 때 오십시오. 흘러넘치는 음식의 거리에서 오히려 허기진 영혼을 위한 집을 세워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