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대란 속에서 널뛰기하는 주가와 금값 소식을 읽다가 집을 나섭니다. 뉴스가 없는 곳을 그리며 어찌어찌 가다보니 북촌입니다. 안국동과 삼청동 사이 고즈넉이 들어앉았던 동네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문득문득 솟은 현대식 건물들 사이 낮은 기와집들이 초라해 보이고 구불구불 좁게 흐르던 골목이 넓어져 자동차들이 속력을 냅니다.
보행자를 위한 길은 없다시피 하지만 모든 길의 주인은 사람 아닌가, 오히려 느릿느릿 걸어봅니다. 정독도서관과 아트 선재센터가 만나는 너른 길에 이르니 커피 향내가 가득합니다. 미국풍 유럽풍 성업 중인 카페들이 경쟁적으로 커피를 볶아대며 행인을 유혹합니다. 여러 십년 동안 즐겨 마시던 커피지만 향기가 너무 짙으니 오히려 마시고 싶은 마음이 달아납니다.
카페에 들어가는 대신 도서관 마당의 벤치에 앉습니다. 바랜 노란 색 도서관 건물과 가을빛을 띠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이루어내는 평화 속으로 커피 냄새가 진군해옵니다. 오랜 독재 정권이 키워준 획일화에 대한 반감과 의문이 솟구칩니다. 녹차, 국화차, 모과차, 유자차, 그 차들의 향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곳에 일렁이던 오래된 시간과 바람의 향기는?
-커피 향기 속 신자유주의-
제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초입니다. 소위 시카고학파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신자유주의 이론이 등장하던 시기이지요. 소득 평준화와 완전 고용을 통한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케인즈 경제학을 부정하며 무한 경쟁을 주창하는 이론입니다.
제가 커피에 중독되는 동안 세계는 신자유주의 물결에 젖어들었고, 커피 농업과 거래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수확이 느리나 자연친화적인 ‘그늘 농법’대신 수확이 빠르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나 비료와 살충제에 크게 의존하는 ‘일광 농법’이 확대되었고, 무수한 중간상들의 개입으로 불공정 거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국제 시장에서 커피 값이 얼마나 오르든 생산 농민의 삶이 악화일로를 걷는다는 게 알려지면서 ‘공정 거래’ 커피도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돈이 중심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커피의 ‘전락’이 특이할 것은 없습니다. 식량마저 돈벌이의 수단이 된 오늘이니까요. 식량 가격 폭등으로 금년 말쯤엔 10억 명의 세계인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게 되리라는 게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얘기입니다. 식량 생산을 2배로 늘리고 기아를 퇴치하기 위해선 매년 300억 달러의 돈이 필요하지만, 금융 위기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돈을 제일 먼저 줄일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합니다.
-인본(人本)은 좌파?-
금융은 한 마디로 돈놀이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걸 만들어 돈을 버는 대신 돈을 이리저리 돌려 이익을 챙기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금융이 전례 없는 위기에 처했으니 그 꽃의 수명이 다한 건 아닌지, 정말 꽃은 꽃인지 의심해야 할 때인지 모릅니다. 신자유주의를 강매하다시피 하던 미국 정부가 시장 개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니 이참에 세상의 운행 방향이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돈이 근본(資本)’인 세상에서 ‘사람이 근본(人本)’인 세상으로요. 네? 자본주의의 종말을 꿈꾸면 좌파라고요? 부자의 손해보다 가난한 사람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는 게 좌파라면 좌파가 되는 게 옳겠지요.
나뭇잎 사이로 바람은 불어도 커피 냄새는 사라질 줄 모릅니다. 잘 사는 나라에서 1 파운드(약 373 그램)당 9달러에 팔리는 과테말라 커피 원두, 그것을 생산하는 농부가 받는 돈은 50센트라고 합니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 옵니다. 다시 사람이 주인인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겨야겠습니다. 어쩌면 오늘 밤 장대비가 쏟아져 저 횡포한 냄새를 지워줄지 모릅니다. 우주는 균형을 지향한다는 그 말을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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