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안과에서 만난 아기 (2011년 1월 11일)

divicom 2011. 1. 11. 15:42

신촌세브란스 병원엔 전국의 환자가 모여듭니다. 작은 병원에 다니다가 더 나은 치료를 받으려고 온 사람도 있고 다른 곳에서 잘못 치료하여 병세가 악화된 사람이 오기도 합니다. 아픈 사람들은 성한 사람들보다 빨리 친구가 됩니다. 제가 들른 곳은 안과, 어제 한 시간 차이로 백내장 수술을 받은 할머니 두 분은 오늘 보니 한 오십년지기 같습니다. 남편 얘기 자식 얘기 부지런한 거미처럼 이야기집을 지으시는데 침묵이 일분 이상 가는 법이 없습니다. 여든넘은 연세에도 소통의 욕구는 저리 푸른가 봅니다.

 

제가 앉은 의자 앞 줄엔 삼십 대 초입의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습니다. 아기의 오른쪽 눈엔 투명한 플라스틱 뚜껑이 덮여 있지만 아기는 명랑한 얼굴입니다. 저쪽 할머니들은 가만히 앉아 입 운동만 하시는데 이 아기는 소리는 내지 않고 끝없이 몸을 움직입니다. 돌 지난 아기 같진 않은데 고르게 난 위아래 이가 참 예쁩니다. 엄마가 정면을 보니 아기는 제가 앉은 곳을 봅니다. 저와 동행을 쓱 훑어보더니 다시 시선을 제게로 보냅니다. 참 잘 생긴 아기입니다. 이목구비가 예쁘다기보다 품위가 있는 아기입니다. 참 이상도 하지요. 이렇게 어린 아기에게서도 격이 느껴지니까요.

 

'자네 참 잘 생겼네!' 마음 속으로 말하며 웃어주었더니 아기가 활짝 웃습니다. '호오, 웃으니 더 멋진데?' 하니 다시 한 번 저를 향해 활짝 웃어줍니다. 아기 엄마가 우연히 웃는 아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어? 준호야, 웬일이야?" 하면서 저를 향해 돌아 앉습니다. "신기하네요. 지금 십 개월인데... 낯을 심하게 가려요. 모르는 사람을 보고 웃는 법이 없는데..." 아기가 다시 저를 보며 웃습니다. "어머, 아주머니가 좋은가봐요." 옆에 앉았던 아기의 외할머니도 한마디 거듭니다. "어머, 정말, 웬일이야? 생전 이런 법이 없는데..."

 

엄마와 외할머니가 뭐라 하든 아기는 자꾸 저를 보고 웃고 아기가 웃으니 저도 따라 웃게 됩니다. 원래 아무에게나 웃어주지 않는 사람이 제게만 이렇게 후하게 웃어준다니 대단한 특혜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곧 아기가 치료실로 들어가고 저도 그곳을 떠나게 되니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집에 와서도 그 아기 생각이 납니다. 그 아기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긴 세월, 그 눈으로 보게 될 무수한 풍경과 사람들... 부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가 타고난 격을 잃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불필요하게 그의 인생에 개입하지 말고 그가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살 수 있게 해주기를 기원합니다. 찰나에 영원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단 한 번 만남으로 친구가 된 준호야, 복 많이 받아라, 꿋꿋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