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나며 비릿하고 더운 바람이 '선선'으로 방향을 틀고
햇살에서도 열기가 다소 빠져나간 듯합니다. 그렇게 보아
그런지 천변의 짙푸르던 나뭇잎들에도 언뜻언뜻 녹이 스는
것 같습니다.
이른 아침 산책로 풍경 중 바뀌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
산책자들이 입고 있는 옷입니다. 젊은 사람은 다섯 중 넷이
검은 옷이고 나이든 사람 중에도 검정이 흔합니다.
전통적으로 흰색 옷을 많이 입어 '백의민족'이 된 한국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아니면 '백의민족'이라는 말 자체가
실제 민족의 의생활 방식과 상관없이 만들어진 정치사회적
용어일까요? '백의민족'이라는 용어는 1920년대 초 일제의
동화주의 정책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었다는 게
'나무위키'의 설명입니다.
재작년인가 조선의 의식주에 관한 책을 의뢰받아 집필할 때
찾아본 자료들에 따르면, 조선에도 화려한 색상 옷이 있었지만
그건 왕족과 양반만이 입을 수 있었고 평민들은 돌, 결혼식 등
특별한 날에만 무색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평민들은 보통
물을 들이지 않은 무명이나 삼베옷을 입었는데 무명은 빨면
빨수록 희어졌다고 합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몇 가지 정보들을 훑어보니 간단한 결론이
나옵니다. 산업화 이전 한반도 사람들은 흰색 옷을 좋아하고
많이 입었으나 이제 적어도 남한에서는 검정이 '최애'색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2004년과 2014년에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옷 색깔을 조사한
것을 보면 검정이 압도적 1위를 차지했는데, 검정을 선호하는
이유는 1. 쉬이 더러워지지 않거나 더러워져도 쉽게 표나지
않는다. 2. 몸이 실제보다 날씬해 보인다. 3. 코디하기가, 즉
맞춰 입기가 쉽다. 등이었다고 합니다.
겨울에 검정을 입는 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위 1.의 이유에
더해 검정이 햇빛을 흡수해 추위를 이기는 데 도움을 주니까요.
그런데 기온이 체온을 넘나드는 여름에도 검정을 입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위 1. 2.에 해당하는 이유에 덧붙여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몸과 마음, 세상살이가 두루 힘들어 현란한
빛깔의 옷을 입을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지요. 물론 이건 제게만
해당되는 해석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저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
검정으로 도망치곤 했고, 지금도 에너지 부족을 느낄 땐 저절로
검정을 입게 됩니다. 제가 아침 산책길의 검정 옷 차림들에게
마음을 쓰는 건 바로 이런 개인적 이유 때문이겠지요.
부디 제가 틀렸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저와 다른 이유로 검정을
선택했길 바랍니다. 예를 들어 모든 색을 다 입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모든 색을 다 품은 검정 옷 차림이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저와 같은 이유로 검정을 입는 사람이 있다면, 계속
입으라고, 만물 중 가장 강한 에너지를 가진 게 태양이니 태양을
끌어당기는 검정을 갑옷처럼 입고 생활전선에 임하라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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