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찌아찌아와 한글 (2010년 10월 9일)

divicom 2010. 10. 9. 09:16

오늘은 한글날. 영어를 배우느라 혈안이 된 한국인들이 오랜만에 제 나라 말과 글을 생각합니다. 마침 한글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방한했습니다. 그들이 사는 바우바우시 초등학교가 1년 전부터 한글 수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한국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줍니다. 언론사들 중엔 '한글, 찌아찌아족 통해 세계로 전파'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놓은 곳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여름 우리 언론이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했다고 흥분하던 생각이 납니다. 언론뿐만이 아닙니다. 정부와 국민도 함께 흥분했습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찌아찌아족을 위한 한글 농사 교본을 만들어 보냈고 지자체 중엔 학용품 등을 보낸 곳도 있었습니다.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나라에서는 홀대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쓴다니까 왜 그리 좋아하는 걸까요? 찌아찌아족 인구는 8만 명 정도라는데, 어떻게 그들을 통해 한글을 '세계로 전파'한다는 것일까요?

 

게다가 한글날을 앞두고 훈민정음학회 초청으로 서울에 온 아미룰 타밈 바우바우 시장은 '인도네시아 정부는 한글을 찌아찌아족의 공식 문자로 채택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난 목요일 (7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언어학 심포지엄에서 "나는 중앙정부에 (채택) 승인을 요청한 적도 없고 그럴 계획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수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국민의 통합과 단결을 위해 '하나의 국민, 하나의 언어'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자신도 그 정책을 지지하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정부에 한글을 공식 문자로 인정해달라는 요청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인정받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언론기관 중엔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계속 '찌아찌아족의 한글 사랑'을 대서특필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찌아찌아족에게 한글 사용을 처음으로 권유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전태현 교수도 서울대 심포지엄에서, 인도네시아의 헌법은 모든 종족의 언어가 로마식 철자법을 따르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우리 언론은 지난 1년간 한글이 타민족에게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영어 철자가 공식 문자 대접을 받고 한글은 보조 문자 취급을 받습니다. 찌아찌아족이든 누구든 한글을 배운다면 환영할 일이지만, 제일 시급한 것은 한글이 태어난 이 나라 안에서 한글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기도 전에 영어 교육부터 받는 현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어의 쇠퇴를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