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눈을 뜨니 저를 에워싼 정적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머리맡의 다지털 라디오는
검은 얼굴뿐 시간을 알려 주던 녹색 숫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거실로 나가니 거실이 산속 절집보다 조용합니다.
절집엔 새소리라도 들리지만 동네 새들은 아직
수면 중인가 봅니다. 충전 중이던 전화기와
작은 청소기, TV와 연결된 셋톱박스 등에서 늘
보이던 작은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냉장고
기계음도 들리지 않습니다. 빛이 사라지면
소리도 사라지나 봅니다.
우리 집 차단기가 내려갔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베란다로 나가니 불 켜진 창문이 하나도 없고
동네 전체가 낯선 정적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집 차단기가 내려간 게 아니고 동네 전체가
정전된 게 확실합니다.
한국전력 상담 전화(국번 없이 123)로 신고하니
이미 신고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며, 기사가
곧 갈 테니 기다리라고 합니다.
촛불을 켜고 책을 펼칩니다. 그러나 읽을 수가
없습니다. 한밤중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라면
촛불이 큰 역할을 할지 모르지만 이미 해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촛불은, 자신만의 이유로 웃었다 울었다
하는 아이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하니 불편합니다.
어쩌면 제가 촛불에 대해 불평하는 건 너무 밝고
흔들림 없는 조명에 길들여졌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새삼 전기가 없던 시절 촛불과 달빛을 이용해
책을 읽었던 조상님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전기는 쓸 수 없지만 물과 가스는 쓸 수 있습니다.
전자렌지와 전기 커피포트 대신 가스에 물을
끓여 커피를 마시다 보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고층아파트에 정전이 되면 거기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50층에 사는데 정전이 되면
50층을 걸어 내려 오고 걸어 올라 갈까요?
물론 아파트 안에 자체 발전기가 있어서 그런
상황이 일어나는 걸 피할 수 있겠지요?
전기와 함께 물과 가스도 끊기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전쟁터에서 겪는
일들을 서울 한복판에서 겪게 될 겁니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큰 문제이겠지요. 생수 사둔 게
있어 당분간 먹는 물 걱정은 없다 해도 생수를
화장실 물 내리는 데 쓰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서울의 삶은 물, 전기, 가스 없이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요?
정전 덕에 평소에 자주 하지 않던 생각을 하며,
사고(事故, accident)가 사고(思考, thinking)의
산파임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혹시 한국전력이 일부러 정전 사태를 야기한 건
아니겠지요? 요즘 사람들이 너무 생각을 하지 않고
사니 정전이라도 일으켜 사고하게 하자고 한 걸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정전 사고 발생 후
2시간여가 지나서야 전기 공급을 재개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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