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감기, 꼬마귤, 드레스 (2008년 1월 11일)

divicom 2009. 11. 2. 07:33
난방은 어렵다. 보일러 스위치만 누르면 되지만 누르려고 하면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들이 떠오른다. 기초생활 보장 급여로 빠듯하게 사느라 겨우내 냉방에서 생활하는 홀몸노인들, 식구는 많아도 쪼들리는 형편 탓에 연료비 감당이 어려운 집들. 해결책 없는 고민을 하는 건 착해서가 아니라 자라면서 줄곧 들어온 협박성 경고 때문이다.
 

제일 무서운 건 먹을 걸 버리면 벼락 맞는다는 말.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살아생전에 허투루 버린 음식을 모두 먹어야 한다니 똥배가 나와도 버리기가 힘들다. 그 다음엔 물.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그동안 낭비한 물을 다 마셔야 하고, 마시다 보면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뻥! 터지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런 식의 협박이 내 안에서 자꾸 새끼를 치는 바람에 경계해야 할 일이 갈수록 많아진다. 춥게 사는 사람 많은데 따뜻하게 사는 것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

 

난방을 많이 하는 집에 놀러 갔더니 몸이 적응을 못하는지 계속 땀이 났다. 젖은 몸으로 찬바람을 쏘여서인지, 우리집이 너무 추워서 그랬는지, 독한 감기에 걸려 앓아눕고 말았다. 문밖 출입 못한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가 귤 한 상자를 보내주었다. 겨우 탱자나 탁구공 크기였지만 어찌나 맛이 좋고 싱싱한지 문병 오는 사람마다 한 봉지씩 싸서 보냈다. 아무리 꺼내도 끝없이 나오는 귤, 크고 깊은 상자에 붙은 딱지를 보니 서귀포 출신이었다.

 

마지막 몇 개 남은 귤을 벗기며 신문을 보는데 명함만한 사진이 눈을 끌었다. 내 손의 귤처럼 작은 귤들이 사진의 절반을 채우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여다보니 “비상품 감귤 폐기”라는 제목 아래 짧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제주 서귀포시 쓰레기매립장에서 지름 51㎜ 이하의 비상품 감귤을 매립하고 있다. 제주도는 감귤값이 계속 폭락하자 비상품 감귤의 유통을 차단해 감귤값을 끌어올리기로 했다.”

 

지름 51㎜ 이하라면 바로 내가 맛있게 먹고 있는 그 감귤 아닌가. 풍년으로 감귤값이 내려가자 상품가치가 낮은 꼬마 귤들을 땅에 묻어 값을 올리려 한다는 거였다. 애써 영글었는데 크기가 작다는 이유로 무참한 운명을 맞다니. 감기가 흔한 겨울엔 비타민C 풍부한 감귤을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생산지를 떠난 과일값엔 살이 붙어 사먹기가 쉽지 않다. 저 어여쁜 귤들을 차디찬 땅에 생매장하는 대신 형편이 좋지 않은 이웃들에게 나눠줄 순 없었을까.

 

기분을 바꾸려고 텔레비전을 켜니 여름 복장의 연예인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 본 <한국방송>의 ‘열린 음악회’가 생각났다. 사회를 보는 아나운서도 출연하는 가수들도 대개 소매가 없고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 차림이었다. 문밖은 영하인데 케이비에스 홀의 온도는 몇 도일까? 기름값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든다는데 …. 냉방에서 이불을 쓰고 앉아 저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

 

추운 기색이라고는 없는 사회자가 웃음을 띠고 “본의 아니게 소홀했던 주변도 돌아보고” 어쩌고 하던 걸 생각하니 협박이 쏟아져 나왔다. “남들 추울 때 혼자 안 춥게 살면 벼락 맞는대!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한여름에 겨울옷 입고 몸 안의 물이 다 마를 때까지 땀을 빼게 되거나, 한겨울에 비키니 입고 이를 딱딱 부딪치다 바스러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