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의심을 찬양함 (2007년 12월 21일)

divicom 2009. 11. 2. 07:30

원래는 맥주 얘기로 ‘삶의 창’을 열려고 했다. 남루한 골목을 떠돌다 답답해진 가슴이 맥주 한 캔에 위로받은 적이 있어, 바로 그 캔맥주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12월14일 <한겨레> 1면에 실린 새 필진 소개가 마음을 바꾸게 했다. 거기엔 내가 ‘시인’이었다.


시를 묶어 책을 낸 적은 있어도 문단에 데뷔한 적은 없다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어 곳에 칼럼을 쓰고 있으니 ‘시인’ 대신 ‘칼럼니스트’로 바꾸어 달라고 할까, 번역한 책이 몇 권 있으니 번역하는 사람으로 해달라고 할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 선거로 피곤한 기자들을 이런 일로 괴롭히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시인’보다 좋은 이름이 어디 있을까 하는 얌체 같은 생각도 들어서였다. 그 대신 그동안 칼럼을 쓰느라 거의 잊고 지냈던 시를 열심히 읽고 쓰자고 결론지었다.

 

시 생각을 하다 보니 잠자리를 비추던 밝은 달이 떠올라 이렇게 써보았다. “달이 누웠던 자리에 누워/소원을 빌다가/달이 내 침상에 와 누운 이유를 생각한다/달도 때로는 눕고 싶은가 보다.” 이게 무슨 시냐고? 맞다, 이건 그냥 흘러가는 생각이지 시가 아니다. 시다운 시를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이든 이름값을 하는 건 어렵다.

 

세상엔 수많은 이름이 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등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이름부터, 시인, 운전사, 장관, 도둑까지 좋고 나쁜 노력을 통해서 갖게 되는 이름이 있다. 하물며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어 그 이름에 걸맞은 결정과 처신을 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어려울 것이다.

 

20세기의 대통령은 ‘거느릴’ 통(統)에 ‘거느릴’ 령(領)을 쓰는 대통령이었지만, 21세기에는 ‘통할’ 통(通)에 ‘들을’ 령(聆)을 쓰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인터넷이라는 소통의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판단과 경청을 요구하니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권력에 안주하거나, 밀실에 들어앉아 사리사익을 챙기는 대통령은 임기를 채우기 어렵게 되었다.

 

사실은, 대통령 당선자가 제일 먼저 저 기름에 오염된 서해안에 갔으면 했다. 지지자도 경호원도 없이, 아름다운 배우 박진희씨처럼 자원봉사자들 틈에 끼어 앉아 돌을 닦으며 바다의 얘기를 들었으면 했다. 머릿속을 채우던 구호와 계산 대신 새 얘기들이 자리를 잡으면, 자신이 싸워야 할 진짜 적이 누구인지, 그 적을 무찌르려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화∼안해질 것 같아서였다.

 

가는 길에 신동엽의 시 <금강> 22장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씻어 내면 또 모여들 올 텐데, 씻어 내면 또 열흘도 못 가 모여들 올 텐데, … 이틀도 못 가 검은 찌꺼기들은 또 모여들 올 텐데, 그러나, 내일 새 거품 모여 올지라도 우선, 오늘 할 일은 씻어내는 일 …”


돌아오는 길에도 시를 읽고 싶다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의심을 찬양함>을 권하고 싶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