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생각해 보면, 책들이 한권 한권 마음속에 떠오른다. 부드럽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고귀하게 영감을 고취하는 책이 있고, 또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꼼꼼히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책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영영 그 책들을 다시는 손에 들게 되지 못하리라. 세월은 빠르게 흐르기만 하는데 그나마 내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내가 임종의 자리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면, 잃어버린 책 중의 몇 권이 내 방황하는 사념 속에 떠오르겠지. 그러면 나는 한때 신세를 졌던 친구들이나 살다가 지나치게 된 친구들을 기억하듯이 그 책들을 기억하리라. 그 책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직을 고하자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 <기싱의 고백>에서 인용.
책 제목의 '기싱'은 영국 작가 조지 기싱(George Robert Gissing)을 뜻합니다. 이 책은 기싱 (1857~1903)의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The Private Papers of Henry Ryecroft)>을 서울대학교 영문과의 이상옥 교수가 번역하여 출간한 것입니다. 원제가 어떻게 해서 <기싱의 고백>으로 바뀐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출판사에서 긴 제목이 책 판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염려하여 임의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기싱은 또 "그동안 나는 어디서나 안식을 찾아보았지만, 책을 들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한 때는 저도 책이 유일한 '안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이 괴로울수록 책에서 얻는 위안과 안식은 컸습니다. 지금은 다른 곳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변함없는 친구입니다.
책을 읽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일년에 삼백 권을 읽었다, 오백 권을 읽었다, 경쟁적으로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쁘다!'를 연발하며, 책을 읽기보다 책에 관한 책을 읽습니다. 남들이 이 책은 이러저러한 책이라고 써놓은 것을 읽고 마치 자신이 그 책을 읽은 듯 착각합니다. 그러나 책은 고귀한 인품이나 교양의 증거가 아닙니다. 고귀한 인품이나 교양을 갖도록 도와주는 친구일 뿐입니다. 좋은 책은 좋은 친구이고 그렇지 않은 책은 시간 낭비이지요.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 있다 보면 "내가 죽음을 위해 멈추지 않으니, 친절한 죽음이 나를 위해 멈추어주었다"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이 떠오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책들에게 하직을 고하는 걸 슬퍼하진 않을 것입니다. 오래된 육체를 벗어나는 기쁨이 친구들과의 이별이 주는 슬픔을 능가할 테니까요.
날씨가 서늘해지니 놀러가기 좋다고 하지만, 소풍에 좋은 계절은 책 읽기도 좋습니다. 조금 더디게 읽히는 책을 골라 어디든 자리를 잡아보시지요. 가끔 하늘을 보며 지금 이 순간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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