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언저리에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1819-1891)의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 Street)'를 읽으며 재미와 슬픔을 동시에 느낀
적이 있습니다.
멜빌 하면 <모비 딕 (Moby-Dick)>만 떠올리던
제게 '필경사 바틀비'는 놀라웠습니다. 마치
존 스타인벡 하면 <분노의 포도>만 생각하다가
'진주 (The Pearl)'를 읽었을 때의 기분이라고 할까요?
변호사 사무실에 새로이 고용된 '필경사 바틀비'에
관한 이 짧은 소설은 단순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이뭐꼬?'와 같은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처음엔 일을 잘하던 바틀비가 언제부턴가 일을 시키면
'하지 않고 싶습니다/하고 싶지 않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하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요즘 한국의 MZ 직장인들 중에도 일을 시키면 '제가요?
왜요?' 하며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어쩜 바틀비가 그들의 조상일지 모릅니다.
저는 MZ 들 같은 질문도 바틀비 같은 저항도 하지 않고
직장생활을 했던 사람이지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연발하며 자기 마음대로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필경사
바틀비가 밉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의 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왜 그러는지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서강대학교 영문과의 황은주 교수가 쓴
<도시의 유목인: 뉴욕의 문화지리학>을 읽고 제가 왜
바틀비의 편이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틀비의 삶이
바로 '도시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들'의 삶이기
때문이라는 황 교수의 해석 덕입니다.
"부동의 저항을 시작한 바틀비부터 뱀파이어가 상징하는
미국의 비체들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도시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살기 위해 만들어 나아간 길, 유목의 흔적을
찾으려 시도했다. 도시의 유목인은 길이 없으면 길을 내며
살 방도를 찾지만 그들의 길은 종종--사무실이든 감옥이든
바틀비가 마주한 것은 결국 벽이다--막다른 길에 이르고,
그들이 가로질러 가기에 자본이 파놓은 홈은 깊고도 넓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장소를 둘러싼 그들의 투쟁을 어떠한
제도적 환대로 맞이할 것인가 자문해야 한다.
21세기에 뉴욕에서 일어난 장소를 둘러싼 투쟁의 중요한
예로 월가 점령 운동Occupy Wall Street이 있다."
--<도시의 유목인: 뉴욕의 문화지리학>, p. 293
월가 점령 운동은 2011년 9월 17일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시작되었으나 11월 15일 새벽 경찰이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며 끝이 났습니다.
"월가 점령 운동을 기리기 위해, 2012년 5월 1일에 일,
학교, 은행업무, 집안 일, 쇼핑을 모두 멈추는 총파업을
제안하는 포스터에는 바틀비의 고집스러운 언명, "난
하지 않고 싶습니다"가 쓰여 있다. 그 아래로는 쳇바퀴를
벗어난 햄스터가 바틀비처럼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98)
뉴욕 최초의 "스콰터" 바틀비는 이렇게 월가 점령 운동의
머나먼 선례로 다시금 태어나고, 무의미한 반복적 노동을
거부하고 자본주의적 리듬에 대해 불복종하는 투쟁의
영감이 되었다.
도시의 유목인은 환대받지 못하는 공간에서 환대받기 위하여,
존재를 인정받기 위하여,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하여,
세상이 미리 정해놓은 규칙대로 살지 않기 위하여 날마다
투쟁하는 바틀비의 후예다. 이들의 삶은 낭만적이지 않으며
그들의 요구는 거의 매번 좌절되어 이들은 멸종의 위기에
놓이기 십상이다. (멸종은 사회의 타자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는 아무도 투쟁하거나 도주하려
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유목인에 대한 절대적 환대가
유토피아적 망상일지 모르겠으나, 그가 이미 태어났으므로,
그가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하므로 그 존재를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같은 책, pp.297-298
*비체(卑體, abject): 주체도 객체도 될 수 없는 존재로 관습적
정체성 및 문화적 관념을 교란하여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존재 자체가 지워진 존재를 뜻함.
*스콰터(squatter): 주택 무단 점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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