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홍세화 선생 별세 (2024년 4월 19일)

divicom 2024. 4. 19. 09:46

4.19 혁명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선생이 별세했습니다. 향년 77세.

봄꽃 세상을 두고 아주 떠나가기엔 좀 이른 나이입니다.

 

선생은 작년 1월 한겨레신문에 쓴 마지막 칼럼에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한때 민주주의적 진보를 주창하던 수많은 '운동가'들이

사람보다 소유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상층부에서

활약하지만, 선생은 끝내  '소박한 자유인'으로, 

이상을 실천하는 '장발장 은행' 대표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삼가 선생의 영면을 빌며, 한겨레에 실린 선생 별세

관련 기사를 조금 줄여 옮겨둡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기사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인용문에 나오는 말없음표 (...)는 문장의 생략을 뜻합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1137290.html 

 

평생 자유 향한 고뇌…진영 넘어선 영원한 비판적 지식인

서당 선생이 학동 삼형제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첫째는 정승이라 했고, 둘째는 장군이라 했다. 얼굴 가득 웃음 짓던 서당 선생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뀐 건 셋째의 대답을 듣고서였다. “장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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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자유 향한 고뇌…진영 넘어선 영원한 비판적 지식인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선생 별세

기자 안영춘

서당 선생이 학동 삼형제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첫째는

정승이라 했고, 둘째는 장군이라 했다. 얼굴 가득 웃음 짓던

서당 선생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뀐 건 셋째의 대답을 듣고서였다.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개똥의 용처를 이렇게 밝혔다. “글 읽기는 싫어하면서

정승 되기를 바라는 큰형 입에 하나, 겁쟁이면서 장군 되기를

바라는 작은형 입에도 하나.”

 

소년에게 우화를 들려주던 외할아버지가 이 대목에서 문제를 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 몫이겠니?” 소년이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선생에게 먹으라고 했겠지요. 두 형의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요."

 

외할아버지는 소크라테스처럼 잇대어 물었다. “너라면 그 말을

서당 선생한테 할 수 있겠니?” 소년은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고

큰소리쳤다. 외할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하게 되면 마지막 개똥은 네 차지라는 걸 잊지 마라, 세화야.”(1)

...

소년의 아버지는 홍(洪, 넓다)씨 성을 가진 아나키스트였다.

일제 강점기 도쿄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표트르 크로폿킨의

‘청년에게 고함’과 ‘상호부조론’을 일본어로 읽었다. 자식 대의

항렬자는 화(和, 화하다)였다. 홍과 화 사이에 세(世, 세상)를 넣어

맏이 이름을 지었다. ‘세계평화’라는 뜻이었다. 둘째 이름은

‘민족평화’를 뜻하는 민화(民和)로 지었다.(2)

 

두 이름 앞에 홍이 붙자 세계는 세계대로, 민족도 세계만큼이나

드넓어졌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과 외할아버지와의 문답은

소년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거대한 만유인력으로 작용했다.

이름은 고개 들어 먼 데를 바라보게 했고, 개똥 문답은 당면한

선택 앞에서 결심의 지침이 됐다. “세 번째 개똥을 하나라도

덜 먹겠노라고 일상적인 고문 행위와 억울한 죽음이 있는 사회에

맞서 나름 저항했다.”(3) 그것은 그의 생애 내내 “버거우면서

기꺼운 짐”이기도 했다.(4)

...

선생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전사’에서

망명 난민이자 작가로, 귀국 뒤로는 한겨레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에 몸담은  언론인으로, 이어 진보신당 당대표라는 현실

정치인으로, 다시 학습공동체 ‘가장자리’와 ‘소박한 자유인’ 대표로,

또 장발장은행장으로 살았다.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서

노역해야 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벌금액 만큼을 빌려주는

장발장은행의 ‘수장’이 된 뒤, 그는 “가장 출세한 자리”라고

서툰 농을 했다. 자기 책상 하나 없는 자리였다.

...

‘소박한 자유인’이라는 이름은 선생이 평생 간직하고 지향해온

이상이 총체화된 형상이다. “소박한 자유인이란 소박한 생존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면서 자아실현 또한 소박한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7) 선생에게 자유란 존재의 존엄과 고결한 삶의

토대를 뜻하는데, 그러려면  신자유주의처럼 무제한에다 만용적이고

타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여서는 안 된다. 소박한 자유에 대한

지향은 자연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기도 하다. 

 

선생의 사상을 우리 사회의 납작한 분류 틀에 ‘배치’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공화주의자이면서 아나키스트이자 사회주의자다.

무엇보다 그가 자유주의자이기에 그렇다. 존재의 존엄을 지키는

자유는 사회정의(공화주의), 자주성과 연대성(아나키즘), 그리고

분배정의(사회주의)와 함께해야 이룰 수 있다고 선생은 믿어왔고,

이를 실현할 구체적 길을 탐문하고 실천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