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교수를 위한 자리는 없다 (2022년 6월 17일)

divicom 2022. 6. 17. 22:31

대학을 죽이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 답이 있습니다.

 

 

교수 식당이 대학을 죽인다

 

한국의 대학 건물 중 괴물 같은 명칭은 단연 교수 식당 내지는 교직원 식당이다. 밥 먹을 때도 신분 직함을 따져 장소를 갈라놓았으니, 갈라치기의 원조 격이다. 한적한 교수 식당에 비해 학생 식당은 늘 많은 사람으로 긴 줄을 서야 한다. 허기를 달고 사는 학생들은 낮은 가격의 학생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서너 시간 뒤 시장기로 뒤틀린 창자의 교향곡을 들으며 공부하고 연구한다. 미국 대학에 오니, 교수나 학생 구분 없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에 줄만 서면 되었다. 먹는 장소의 차별이 신분에 따라, 그것도 지성을 대표한다는 대학에 버젓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저명인사 초청 세미나. 컵과 음식물에 엑스 표시를 한 스티커가 강당 앞에 붙어 있다. 세미나실에서는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엄격히 제한한다. 교수들이 대부분 강당 앞부분에 앉고, 학생들은 주로 뒷자리부터 메운다. 교수만을 위한 지정석을 표시하는 때도 있다. 미국은 세미나 시간에 따라 점심 또는 간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자기가 가져온 도시락을 자연스레 꺼내 먹는다. 포장지 뜯는 소리, 후루룩, 아작, 어떤 소리에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다. 먹으면서 듣는 강의가 더 쏙쏙 들어온다. 세미나에 늦게 들어온 교수는 서 있거나, 바닥에 털썩 앉는다. 교수를 위한 자리는 따로 없다. 자리를 양보하는 학생도 없다.

 

세미나를 마친 뒤풀이. 한국 교수 몇 명과 초빙된 학자가 교수 식당의 같은 테이블에 앉고, 세미나에 참석한 대학원생들은 다른 공간에서 음식을 먹는다. 학문적 호기심이 있어도 따로 질문할 기회는 원천 차단된다. 그들만의 대화가 웃음소리에 섞여 들리지 않는다. 미국의 뒤풀이 장소는 같은 공간에 교수와 학생, 초빙 학자가 섞여 있다. 교수는 학생들의 궁금한 질문을 위해 가까운 자리를 양보한다.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 토론한다. 개인적 관심사를 질문하기도 한다. 학문이란 열리지 않으면 소통할 수 없는 것이다. 먹고 마실 때 목구멍 따라 맘도 열린다.

 

한국 대학의 위기를 말할 때마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등록금 의존형 대학 재정 악화 또는 동결 등록금으로 인한 재정 압박 등 주로 돈과 관련한 원인만을 귀 따갑게 들어왔다. 하지만 누구도 깊숙이 뿌리박힌 대학의 꼰대 문화가 대학 발전을 저해해왔다는 걸 지적하지 않는다. 교수 식당은 꼰대 문화의 대표적 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못하게 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이 먹는 공간조차 함께 쓰는 걸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수직형 인간관계에서 사실 토론은 논의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깝다. 다른 생각을 제기하면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명령 불복종 정도로 취급한다. 그래서 한국의 대학에서는 지도교수와의 논쟁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눈 밖에 나면 졸업은 요원하다.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열악한 연구실 환경이다. 교수 한 명이 쓰는 사무실에는 텔레비전과 소파, 심지어 헬스 기구까지 설치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 학생은 좁은 실험실에서 등을 맞대고 실험하면서, 식사도 해결한다. 연구원들의 실험실과 식사 공간은 연구자의 안전을 위해 엄격하게 분리,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나, 많은 대학이 공간 협소를 이유로 이를 지키지 않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미국 대학 교수의 사무실은 컴퓨터 책상과 몇 명이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연구원 휴식 공간은 편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정수기, 냉장고, 마이크로웨이브, 식기세척기 등을 갖추고 있다.

 

대학의 발전은 대학의 문화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식사 문화 하나만 바꾸어도 교수와 학생 사이에 동질감이 나타난다. 젊은 연구자와 나이 든 연구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교수 식당을 없애라. 나온 김에 하나 더. 교수 화장실도 없애라. 배설하는 데 우선순위는 없다. 급한 사람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