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장관의 딸 (2010년 9월 3일)

divicom 2010. 9. 3. 19:36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이 외교부에서 뽑는 FTA 통상 전문직에 합격해 문제가 되는 것을 보니 한심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주에 끝난 청문회 결과 총리와 장관 몇 명을 새로 임명해야 하니, 그때 외교부 장관도 함께 경질하면 될 테니까요.

 

외교부는 7월 1일 FTA 통상 전문직 1명을 뽑는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특채 조건은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로서 2년 이상 관련 업무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당시 응모한 8명은 모두 학력 조건은 만족시켰으나, 7명은 업무 경험이 없었고, 유 장관의 딸만 업무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대 국제대학원을 졸업한 유씨는 2006년부터 3년간 외교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 두 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씨가 시효가 지난 어학 성적증명서를 제출하는 바람에 당시 응모했던 8명 모두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외교부는 7월 17일, 1차 공고 때와 같은 조건으로 재공고를 냈고, 6명이 지원하여 3명이 서류 전형에 합격했는데, 그 중에서 유씨가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문제가 되자, 외교부는 "특별채용자 선발절차는 관련 법령에 따라 진행한 것"이라고 하고, 유 장관은 기자들에게 "아버지가 수장으로 있는 조직에 (딸이) 고용되는 것이 특혜의혹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유 장관 딸 사건을 접하니 지난 달 정부가 행정고시 선발 인원을 줄이고 전문가 채용을 늘이겠다고 발표했을 때 저희 아버지가 탄식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앞으로는 가난하고 인맥 없는 사람은 고급공무원 되기 어렵겠구나!" 라고 하셨거든요.

 

유 장관이 "아버지가 수장으로 있는 조직에 (딸이) 고용되는 것이 특혜 의혹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여 송구스럽다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씁쓸한 웃음이 나옵니다. 자신이 외교부 제1차관으로 재직 중이던 2006년에도 딸을 계약직 공무원(연구원·5급상당)으로 특채했었으면서, 이제와 이런 얘기를 하니 말입니다. 

 

오늘 '노컷뉴스'에는 "유명환 장관이 딸의 특채를 위해 응시자격 요건도 고쳤다"는 언론연대 대외협력국장 박영선씨의 말이 실렸습니다. 박 국장은 "지난해 5급 특채 자격요건은 변호사 또는 박사였으나 이번 자격요건은 석사로 바꿨다"며, 자신의 트위터(@happymedia)에 작년과 올해 외교통상부가 게시한 특별채용 공고문 사진을 올려 비교할 수 있게 했습니다. 박 국장은 또 "지난해 5급 특채 때는 서류전형-어학시험-외교역량평가-심층면접 과정을 거쳤지만, 이번에는 서류전형-심층면접 2단계로 완화"시켰고, 유씨를 특채하기 위해 응시 제출서류도 줄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기자 시절 3년 동안 외교통상부 (당시엔 외무부)를 출입한 적이 있습니다. 외교부는 다른 부처에 비해 5급 고시 출신의 비율이 높아 그 어느 곳보다 직원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한 곳입니다. 게다가 외교관으로서 근무해야할 나라도 유럽, 미주 국가부터 아프리카의 최빈국까지 다양합니다. 그러다보니 어지간히 용기있는 사람이라 해도 윗사람의 비위를 거스르기 힘이 듭니다. 2006년 유 장관의 딸이 특혜를 받아 외교부에 채용되었다는 말이 나오는 건 당연합니다. 

 

외교부의 직원이 나가서 근무할 국가의 수준이 다양한만큼, 외교부 인사의 공평성은 늘 문제가 됩니다.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근무하기 편한 나라('온탕'이라고 부릅니다)에서 근무한 사람은 다음 번엔 좀 힘든 나라 ('냉탕')에서 근무하게 하고, '냉탕'에서 근무한 사람은 '온탕'으로 보낸다는 불문율 비슷한 게 있지만 '능력' 있는 사람들에겐 그런 원칙도 통하지 않습니다. 유 장관이야말로 그런 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외교부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장관 프로필을 보면, 유 장관은 '냉탕' 근무를 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소위 '노른 자위'라는 직책만 맡아 승승장구해왔습니다. 저는 1980년대 외무부를 출입한 인연으로 훌륭한 외교관들을 여럿 알았고, 그들에게서 뛰어난 동료나 후배들 얘기를 들은 적도 많지만, 유명환 씨의 실력이 훌륭하다거나 뛰어나다고 하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 장관이 이 정부에 의해 외교부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최장수 장관이 되었으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물론 고위직일수록 실력이외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건 저도 압니다만.

 

유 장관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저는 이명박 대통령이 장관을 바꿀 때마다 유 장관의 경질을 기대해왔습니다. 이미 때늦은 감이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외교부 장관이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통령이 유 장관 딸 소식을 듣고 '개탄'하셨다니 다시 한 번 기대를 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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