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머니 댁에서 어머니의 증손자들을 보았습니다.
어린 오빠와 동생이 소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인형보다 예쁜데, 어찌된 일인지 그 모습이 제 마음에
슬픔을 일으켰습니다
"안녕? 오랜만에 보니 많이 컸네! 아주 소녀가 되었어!"
작은 소녀에게 말하자, 소녀가 어깨를 으쓱 올려
자신을 키우려 애썼습니다. 그 모습이 어여쁜 만큼
슬픔도 커졌습니다.
그의 앞에 펼쳐질 긴 시간과, 그 시간 동안
그가 겪을 일들에 대한 쓸데없는 예상이 빚어낸
슬픔이겠지요. 그러니 그 슬픔은 오롯이 저의 것,
내색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와, 어깨를 올리니 키가 더 커지네!" 추임새를 넣으니
소녀가 살짝 웃어주었습니다. 그의 귀여운 발을
어루만지며 그 발이 걷게 될 인생의 여로를 축원했습니다.
2020년은 그 어느 해보다 두려움과 슬픔이 만연했던
한 해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 이토록 많았던
해는 없었습니다.
갑작스런 재앙과 예상치 않았던 사별 앞에서 허둥댄
사람들, 임종은 커녕 장례식 전에 화장을 해야 했던
상주들도 많았습니다.
이 비극적 한 해는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이고,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헤어진다는 것은 무엇이며 슬퍼한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삶이 죽음으로 완성된다면 죽음은 무엇으로 완성되느냐고...
질문은 사람과 책 사이에 놓인 다리 같은 것.
아래는 에리히 레마르크(Erich Remarque)의 소설 <개선문>에서
주인공 라비크가 자신의 사랑 조앙에게 하는 말입니다.
"..(생략) 내가 알고 있는 한 친구는, 아내가 죽은 순간부터 장례가
끝날 때까지 방문을 잠그고 들어앉아 체스 문제를 연구했어.
주위 사람들은 그를 몰인정한 사람이라고 수군거렸지. 그러나 나는
그 친구가 자기 아내를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 친구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전연 몰랐던 것이지. 그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낮이고 밤이고 장기의 문제를 풀었던 것이오."
"또 한 사람 아는 이가 있었는데, 그 사람 역시 아내가 죽었소. 그런데
그 친구는 침대에 누워서 이틀간이나 꼬박 잠만 잤지. 그 친구가
그랬다고 해서 죽은 아내의 어머니는 펄펄 뛰며 화를 냈지. 하지만
인간이란 여러 가지 모순된 행동을 하면서 동시에 완전히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어머니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지. 불행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에티켓이 고안되어 있나를 생각하면 참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하략)"
2020년을 살아내고도 누군가의 삶의 방식에 대해, 누군가의
슬픔의 방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어리거나 어리석은 사람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