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배추 같은 사람 (2020년 12월 31일)

divicom 2020. 12. 31. 12:39

마침내 2020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것들이 모두 오늘과 함께 물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한 번 일어난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경우는

드물고,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나쁠 수도 있었다'고 마음먹고,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지난 시간을 반성해야 하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많은 분들의 도움 덕에 또 한 해를 살았습니다.

다양한 선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합니다. 쌀과 빵부터 돈과 약까지... 참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같은 것으로 보답하진 못하겠지만, 악화되지 않는 것이

보답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 진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악화되지 않는 것이 새해의 포부가 될 수는 없겠지요.

 

새해, 저는 배추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래 글을 보시면 왜 제가 그런 목표를 갖게 되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와 같은 목표를 갖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 목표를 이루는 사람이

많아지면, 2021년은 2020년보다 더 평화로운 한 해가 되겠지요. 

 

제가 아는 모든 분들, 알지 못하는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어

그 복을 널리 나누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배추와 인간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눈 덮인 고깔 모양 움 안에서 꺼낸 통배추를 반으로 가르면 하얗고 노란 색조가 완연하다. ‘가운데 갈비’란 뜻을 담아 중륵(中肋)이라 불리는 두툼하고 흰 조직엔 수용성 탄수화물이 풍부하다. 중륵을 감싸는 조직인 내엽(blade)은 당근처럼 카로틴이 풍부해 색이 노랗다. 김치의 주재료이지만 생으로도 즐겨 먹는 통배추는 어찌 보면 과일과 닮았다. 둘 다 광합성 부산물을 인간에게 제공하는 대신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기 때문이다. 날이 서늘해지면 배추는 안으로 조직을 채우면서 엽록소가 만든 설탕을 과당과 포도당으로 분해해 당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단맛을 선택했다지만 배추는 무슨 까닭으로 중륵에 당을 저장하는 것일까?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배추는 씨를 퍼뜨리고자 단맛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 한편 당은 식물이 추위를 견디는 데도 한몫한다. 포도당이나 과당이 훌륭한 부동액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다디단 배추는 인간이 겨울을 나는 데 안성맞춤 동반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배추는 과일만큼 달지는 않아 알코올 발효를 하는 효모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렇기에 배추술은 없을망정 샐러드와 김치로 우리 곁을 오롯이 지키고 있다.

 

김치의 재료는 향신료를 제외하면 배추과(Brassicaceae) 식물들이다. 배추, 무, 갓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하얗거나 노란 이들 식물의 꽃은 예외 없이 모두 십자 모양이다. 그래서 분류학자들은 이들을 십자화과라고도 부른다. 관상용이나 기름을 얻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유채도, 식물 연구 실험 모델로 확고히 자리 잡은 애기장대도 모두 배추과 소속이다.

 

이들의 계보를 살펴보려 논문을 뒤적이다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를 지닌 순무와 배추족(族) 유전체를 분석한 ‘네이처 유전학’ 논문의 첫 문장에서 나는 ‘우(U)의 삼각형’이란 단어를 발견했다. 그 용어의 출처는 ‘나가하루(Nagaharu) 우’ 박사가 1935년 쓴 논문이었고 놀랍게도 제목에 유전체(genome)란 단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유전체란 말이 쓰인 게 신기해서 더 뒤적여보니 논문의 저자는 ‘우장춘’ 박사였다. 21세기 유전학자들이 우장춘 삼각형의 생물학, 진화학적 의미를 좇아 연구에 매진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었다. ‘씨 없는 수박’을 국내에 소개했고 식용 작물 육종에 헌신한 우장춘 박사를 2016년 논문에서 만난 일은 의외의 즐거움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종은 다를지라도 같은 속(屬)으로 분류되는 배추와 양배추 또는 배추와 갓을 교배하면 유채와 갓을 만들 수 있다는 선구적인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종의 경계를 넘어 식물을 교배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당시의 과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대의 유전체 분석을 거쳐 ‘우의 삼각형’은 실험 검증대를 무사 통과했다. 유전학자들은 약 1500만년 전 신생대에 배추과 조상 식물의 유전체가 세 배로 불어난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다. 유전체가 커지면 식물은 그것의 크기를 줄이고 원래대로 돌아가려 애쓰지만, 간혹 여분의 유전자에 다른 기능을 부여하며 새로운 종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아마 통배추의 조상도 그와 비슷한 역사를 겪으며 신석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중국의 왕샤요우 박사는 식물 호르몬을 생성하는 유전자를 활성화해 내부 조직의 당도와 영양가를 높인 통배추가 약 500년 전부터 명나라에서 재배되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통배추가 등장한 때는 19세기 말쯤으로 보인다. 배추의 등장으로 고추와 마늘, 생강은 마침내 삼동을 버티는 김치로 환골탈태하게 된 것이다.

 

배추는 인간 진화에 이바지한 것 같다. 인류의 요리 방식이 정착하는 데 일조한 듯 보여서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이 안전하게 불을 제어할 수 있게 된 건 연기와 그을음의 독성에 저항하는 유전자를 진화시킨 덕분이다. 배추나 콜라비를 먹으면 저 유전자가 해독 단백질을 만들어 우리의 소화기관을 보호하고 면역계를 강화한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연구 결과가 꾸준히 나오는 걸 보니 늘 먹는 김치가 새롭게 보인다.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생명체의 응원이 필요했을까? 우거지 허투루 버리지 말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2310300005&code=990100#csidx62ee28d93b1b12a9f8fbdb943e214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