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52: 아버지, 그리고 덴마크 무궁화 (2020년 9월 19일)

divicom 2020. 9. 19. 11:19

5월 17일 혜은, 혜선 자매로부터 선물 받은 덴마크 무궁화가

어제 새 꽃을 두 송이나 환하게 피웠습니다.

무궁화와 제가 만난 지 꼭 4개월.

무궁화가 이 등불 같은 꽃들로 우리의 우정을 축하하는 걸까요?

 

처음 올 때는 꽃을 달고 왔는데 한동안은

잎 늘리기에만 전념한 듯 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촛불 같은 봉오리가 맺히기에 마침내

잎의 시간이 끝나고 꽃의 시간이 시작되는가 했는데

그 촛불에 불이 붙어 세상이 환해지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을 흔들어대는 속도라는 것도 꽃에겐 범접하지 못하나 봅니다.

 

내일은 아버지가 이승을 떠나신 지 만 5년이 되는 날입니다.

가장 오랜 스승이며 친구인 아버지를 뵙지 못한 지 5년...

 

아버지의 부재는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저와 주변을 비췄습니다.

살아계실 때는 늘 제가 당신을 찾아뵈었으나 떠나신 후엔

시시때때로 제게 오셔서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어리석은 딸은 60여 년 동안 알았던 아버지가 떠나신 후에야

그 분이 누구인지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분과 저의 관계는 이제 겨우 5년이 된 셈입니다.

 

진실로 누가 누구를 안다고 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의 시공간에

있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되는 건지 모릅니다.

 

아버지를 조금 알게 되면서 저라는 인간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되었고,

아버지 덕에 맺었던 관계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지상의 세월은 제가 태어나 살아가는 세상을 배우는

‘잎의 시간’이었고, 이제야 저라는 ‘꽃의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할까요?

 

아주 잠시라도 아버지가 오래 전처럼 당신의 방에 계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 환한 덴마크 무궁화를 안고 찾아뵙고 싶습니다.

‘야, 그 꽃 참 탐스럽구나!’ 하며 환하게 웃으실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젊은 친구들에게서 선물로 받은 꽃이라 하면, 손아래 사람에게도

하대하는 법이 없던 아버지는 ‘그, 참, 고마운 분들이로구나!’ 하시고는

눈을 빛내시며, ‘그런데, 그 꽃 이름이 왜 덴마크 무궁화냐?’하시겠지요.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

부디 그곳에서 자유롭고 평안하소서.

 

혜은씨 혜선씨,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