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36: 나이야, 미안해 (2020년 6월 27일)

divicom 2020. 6. 27. 07:12

엊그제 밤새 비 내리고 난 새벽

회색 하늘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어서 저 하늘 아래를 걷고 싶었습니다.

 

손바닥 노트, 볼펜, 비상금이 든 카드 지갑 하나를

청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 디스크엔 ‘빨리 걷기’가 명약이라기에

아침 일찍 홍제천변을 걷곤 했는데

그날은 하늘에 이끌려 더 일찍 나선 겁니다.

 

비 그친 세상에선 숲의 향기가 났습니다.

낡은 운동화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습니다.

성큼성큼 신나게 걸었습니다.

걷다 보니 작은 물고기의 비늘 같은 빗방울이 날렸지만

저는 가뭄 끝에 비를 만난 풀처럼 행복했습니다.

 

신나게 걸은 후엔 천변 바로 윗길에 있는 편의점 앞에

앉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비는 자꾸 굵어지고 바람도

차가워졌지만, 진초록 차양 아래서 비바람 향기를 맡으며

마시는 천오백 원짜리 커피가 그 어떤 유명 카페의 커피보다

맛있었습니다.

 

그 행복감을 노트에 적었습니다.

천변의 나팔꽃이 우울한 행인을 위로하듯

그날 작은 노트에 적은 몇 줄이 어느 우울한 날

저를 위로해주겠지요.

 

그렇게 행복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날은 반팔 티셔츠 위에 긴팔 옷을 하나 덧입곤 했는데

그날은 서둘러 나서느라 덧옷을 잊었던 겁니다.

 

집에 돌아와 몸을 따뜻하게 하고 쌍화탕도 먹었지만

한번 오르기 시작한 열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타이레놀을 먹고 이불 속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낭만을 누리지 못하는 나이가 된 것인가!’

마음속으로 탄식하다보니 옛일이 떠올랐습니다.

이십 대 어느 여름 폭우가 쏟아지는 동인천에서

신나게 비를 맞은 후 고열에 잡혀 며칠간 끙끙 앓았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나이가 아니고

순간의 행복에 자신을 던지는 저의 기질이었던 겁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나이 탓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쉽게 잊는 것도 쉽게 화내는 것도 다 나이 때문이라고.

 

그렇지만 공정히 생각해 보면 나이는 죄가 없습니다.

기질이나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지요.

다시는 나이 탓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런데 비 향기에 투신하는 기질은 어쩐다지요?

계속 ‘카르페 디엠(carpe diem)’식으로 살아야 할까요,

나이 뒤에 숨어 죽은 듯 살아야 할까요?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저는 비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