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37: 빗물 젖은 벤치(2020년 7월 1일)

divicom 2020. 7. 1. 12:26

어린 시절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뭐냐고 물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초록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생각한 후 답합니다.

초록 나뭇잎과 회색 하늘 중 하나를 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회색 하늘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아침 일찍 산책에 나섰습니다.

어젯밤 내린 비가 먼지를 씻어내고

열기를 식혀준 덕에, 세상이 선명하고

공기는 선선했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걷다가 사람 없는 길에서

마스크를 벗으니 풀, 나무, 하천...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의 향기가 왈칵

포옹처럼 온몸을 감쌌습니다.

 

산책로 가장자리에 놓인 벤치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것도 아마 이 향기

때문이겠지요. 마스크는 유리문처럼 향기를

막으니까요.

 

작은 얼굴에 더 작은 마스크를 쓴 어린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아이들은 이 향기를 느끼기 전에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는 게 아닐까

안타까웠습니다.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고 싶은데

어제 내린 비가 아직 흥건했습니다.

휴지가 있으면 빗물을 닦고 앉을 텐데...

 

그러고 보니 두어 개의 벤치에만 사람이 있고

대부분의 벤치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군가 빗물을 닦아낸 벤치엔 다른 사람도

앉을 수 있지만, 아무도 빗물을 닦지 않은

벤치엔 아무도 앉지 못하는 것이지요.

 

문득 등산을 갈 땐 밧줄과 구급약을 챙긴다는

후배가 떠올랐습니다. 산에서 갑자기 누군가를

구해야 할 때 장비나 약품이 없어 구하지 못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부터 저는 그 친구를 존경합니다.

 

휴지는 없지만 저도 지친 누군가를 앉게 하고

싶었습니다. 빗물이 좀 적은 벤치에 앉았습니다.

청바지를 입길 잘했습니다.

청바지는 본래 빗물에 젖어도 되는 노동복이니까요.

잠시 앉아 작은 노트에 뭔가를 끄적이고 나니

땀이 식었습니다. 다시 걸었습니다.

 

갔던 길을 돌아오다 제가 앉았던 벤치를 보니

초로의 여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하루의 반 이상 남은 시각,

하루치 보람을 느끼며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