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35: 세상 참 좋아졌어 (2020년 6월 22일)

divicom 2020. 6. 22. 07:06

몇 해 전 이맘때는 시장이나 마트에서 잘 생긴 감자를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어쩌다 잘 생긴 감자를 만나면 값이 너무 비싸 사 먹기 힘들고

사 먹을 수 있는 값의 감자는 너무 작거나 못 생긴 것들뿐이었습니다.

 

'하지 감자'라는 말이 있듯이 하지 때 감자가 제일 맛있는 법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잘 생긴 감자는 '감자깡' 회사들이 다 사재기라도 한 걸까?

못난이 감자를 사 먹으며 불평하곤 했습니다.

 

감자를 키우는 농가가 갑자기 늘어났는지, 감자깡 회사들이 사재기를 하지 않는지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올 여름엔 잘 생긴 감자를 만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볶아 먹고 조려 먹고 부쳐 먹고, 감자는 타고난 맛이 강하지 않아

여러 가지 요리를 해먹기 좋은 재료입니다. 

 

오랜만에 감자를 마음껏 먹으니 어르신들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세상 참 좋아졌어!' 구하기 어렵던 실한 감자를 쉽게 구해 매일 먹을 수 있으니

세상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감자를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육십 대 후반까지도 사회 비판에 날을 세우던 분들이 칠십 대에 들어서며

'세상 참 좋아졌어!' 하시는 일이 흔합니다. 그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대개

전에 구하기 힘들던 것을 이제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거나,

예전엔 비싸던 것이 이제 싸졌다거나, 새로운 도구의 사용으로

생활이 전보다 편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하기 힘들던 것을 쉽게

구하게 되고,생활이 전보다 편해지면 세상이 좋아진 걸까요?

 

나이 드신 분들이 '세상 참 좋아졌어'라고 말씀하시는 건 어쩌면 그분들이 지치셨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대안을 생각해내는 것, 소위 '공적 정의'를 끝없이 추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감자는 개성이 강하지 않아 다양한 요리를 해먹기 좋지만 감자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감자의 유연함은 식재료로서는 큰 장점이지만 사람이 감자 같으면 아무래도 비굴할 것 같으니까요.  

 

세상의 문제를 응시하고 대안을 생각해내는 건 힘들지만 저는 아직 '세상 참 좋아졌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편리해졌지만 정신과를 찾는 사람의 수는 날로 늘고 있고 전대미문의 범죄 또한 계속 이어지니까요.

 

잘 생긴 감자가 흔해 비싸지 않은 가격에 사 먹을 수 있는 올 여름은 

감자를 마음껏 먹을 수 없었던 여름들에 비하면 좋지만, 감자는 감자일뿐

세상이 좋아진 것은 아닐 겁니다. '좋은 세상'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인데, 지금 우리 사회엔 평화로운 마음의 소유자가

많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