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는 누구인가 (2010년 8월 14일)

divicom 2010. 8. 14. 08:38

선약이 있거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때는 할 수 없지만

대개 어머니가 부르시면 달려 갑니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바쁠 때에도,

계획을 많이 세운 날도, 어머니 전화 한 통이면 이 세상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되어 나갑니다.

 

어머니는 제가 직장에 다니지 않으니 심심할 거라고, 그러니 가끔

불러내어 점심을 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얼마나 시간에 쪼들리는지, 직접적으로 우회적으로 얘기해도

어머닌 바로 잊어버립니다. 아니면 아예 귀담아 듣지 않거나.

 

오늘은 꼭 이것 저것을 하리라 마음 먹은 아침 어머니의 전화가 오면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어떻게 보면 어머니는

제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입니다. 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오면 하루가

절반으로 줄어들거나 아주 날아가버리니까요. 

 

어머니는 저보다 스물네 살이나 많지만 체력은 저를 능가합니다.

어머니를 따라 다니다 돌아와 병이 난 적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사실을 어머니에게 얘기한 적도 있지만, 그 얘기도 바로

잊어버립니다. 아니면 아예 듣지 않거나.

  

제 아우 하나도 저처럼 회사에 다니지 않고 글을 쓰지만, 그는 

어머니가 불러도 나가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열 일 제치고

어머니와 점심을 먹으러 가는 대신 자신의 일을 합니다. 그는

가끔 제게 충고합니다. 제 일을 하라고, 어머니가 부르면 하던 일

제쳐놓고 나가는 거 그만 하라고.

 

찬찬히 저를 들여다봅니다. 왜 저는 그와 같이 하지 않는 걸까요,

혹은 못하는 걸까요? 제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누구일까요?

저는 왜 아무리 바빠도 어머니가 부르면 나가는 걸까요?  

 

그건 무엇보다 제 마음이 약해서입니다. 어머니의 전화 목소리에 담긴

'저와 놀고 싶어하는 마음'을 못 본 척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일을 하고 싶지제게 자신의 시간을 덜어준 이를 외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건 제가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하는 건 좋지만, 성취가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어머니가 불러 나갔다 왔습니다. 하던 일에 박차를 가하려고 마음

먹은 아침에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거든요.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커피를 마시다가 옛이야기를 하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영영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유일한 성취라곤 어머니가 부를 때 거의 항상 달려나갔었다는 것

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제게도 한 가지 이루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살아내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사는 것입니다. 하루에

마흔 명이 삶을 포기하고, 부끄러움이 무언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이십일 세기 한국에서, 제 목표는 결코 이루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꼭 살아내시길 바랍니다. 어머니가 부를 때 달려나가는가

나가지 않는가, 무언가를 이루는가 이루지 못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살아내는 것,' 가능한 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어머니처럼 살든, 제 아우처럼 살든, 저처럼 살든, 어떻게 살든,

생은 긴 우주의 시간 속 찰나라는 사실에서 위로 받으며, 

스토커 같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오히려 친구삼아 꼭 살아내시길 기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