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앙드레 김 선생님께 (2010년 8월 12일)

divicom 2010. 8. 13. 00:36

오랜만의 모임, 제 나이에 걸맞은 원피스를 입고 나갔습니다.

꽃을 잘 가꾸어 마당을 자연학습장으로 만든 선배네 구경을 하고

달맞이꽃 한 줌을 얻어 나서는데, 나선 김에 꽃구경을 가자

사람이 많았습니다. 간간이 비 뿌려 먼지 없는 길이 자동차 속에

있어도 제법 상쾌했습니다. 저만치 서오릉으로 접어드는 샛길,

그 어느 때보다 안온해보여 잠시 죽음이 휴식임을 생각했습니다.

 

여름 꽃집엔 인적이 드물지만 꽃들은 여전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열매가 적잖이 열린 무화과는 기특하고, 연꽃은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며, 채송화는 그대로 작은 별이었습니다. 아메리칸 블루와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을 사고, 그 꽃에 'Lips After Kiss' 라는

이름을 붙이며 큰 소리로 웃기도 했습니다. 그 꽃 빛깔이 꼭 입맞춤을

열렬히 하고 난 후 살짝 번진 립스틱 같았거든요.

 

집에 오자마자 비닐 화분에 담겨 있던 꽃들을 흙 화분에 옮겨 심고

"함께 자라자꾸나" 토닥여주었습니다. 흙 묻은 손을 씻는데

겨드랑이가 간질간질, 날개가 솟는 것 같았습니다.

아홉시 뉴스에선 언제나처럼 추한 정치인들이 웃었지만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즐겁던 하루가 금세 어두워지며, 솟았던 날개가 사그러들고,

꽃들은 일시에 시무룩해졌습니다.

 

2003년인가 2004년, 제가 미국대사관 문화과에 근무하던 때,

선생님이 미국대사의 관저에서 열린 모임에 손님으로 오신 적이

있었지요. 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 많던 선생님, 특히 외국 대사

부인들이 선생님과 친하고 싶어 안달을 했지요. 품위 있는 영어와

유머, 상대를 기분좋게 압도하는 따스함, 무엇보다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로서 선생님이 보여주신 능력 때문이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도 선생님의 열렬한 팬

하나였습니다. 선생님의 샘솟는 창의력, 국산 옷감만을 사용한다는 원칙,

어느 외교관 못지않은 외교 능력 등에 대해 무한한 존경을 품고 있던 터라,

선생님께 다가가 사인을 부탁했지요. 선생님을 존경하던 제 아이에게

선생님의 사인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전방에서 군 복무 중이던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거든요.

 

선생님은 참으로 겸손하고 다정하게 아이의 이름을 물으시더니

제가 드린 흰 종이에 아이의 이름을 영어로 쓰셨는데, 스펠링을

묻지도 않고 정확하게 아이가 쓰던 대로 쓰시어 놀라웠습니다.

선생님은 또 두어 마디 건강을 기원하는 문장과 함께 'Fighting!'이라고

써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선생님이 생면부지 아이에게 보여주신

애정과 정성을 영영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 제가 일하던 과의 과장은 캘리포니아 출신의 외교관이었는데,

한국 사람들에게 다소 오만하던 그가 선생님께는 얼마나 깎듯하던지

놀랍고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는 몇 해 전에 선생님이 만드신 드레스를

구입했다고 자랑했는데, 자신과 같은 사람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귀한 것을 가져 영광이라는 태도였습니다.

 

선생님, 언젠가 여성의 옷차림에 대해 말씀하셨죠? 유행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아무리 미니가 유행해도 나이든

여성이 미니를 입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옷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선생님 스스로도 맑은 영혼과 무한한 창의성을

보여주는 흰 옷만을 입으셨지요?

 

선생님 연세 이제 겨우 일흔 다섯, 이 장수의 시대에 왜 그리 서둘러 가시나요?

대장암으로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지난 3월 베이징에서 '앙드레 김 아트 콜렉션'을

개최하셨고, 언젠가는 자금성에서 패션쇼를 열고 싶다고 하셨는데...

 

부디 낡은 몸 벗어 저승에 두고 서둘러 돌아오소서.

때론 입맞춤, 때론 웃음, 때론 눈물의 흔적인

당신의 아들 딸들로 헐벗은 영혼들 감싸게하소서.

 

이곳은 아직 피워야 할 꽃 많은 당신의 꽃밭

안식 잠시 미뤄두고

 

선생님, 부디 돌아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