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신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다(2020년 3월 28일)

divicom 2020. 3. 28. 10:24

경향신문을 구독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바티칸 대법원의 유일한 한국인 변호사 한동일 교수의 글을 

읽는 것입니다. 서강대학교에서 인기리에 진행된 명강의 <라틴어수업>이 책이 되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강의를 직접 듣진 못했으나 드문드문 연재되는 '라틴어수업 2020'을 읽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오늘 경향신문에 실린 글인데 신문의 한 면 전체를 차지하는 글이라 맨 앞 문단과

뒷부분만 옮겨둡니다. 맨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원문과 관련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 2020](4)예배 강행은 신의 뜻? 신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을 겁니다

근래 일요일이 가까워지면 긴장감이 높아지는 곳이 있다. 교회다. 정확히 말하면 예배를 하려고 많은 사람이 모인 교회와 그 주변이다. 코로나19로 방역 당국은 사람 간 감염 위험이 높아지는 주일예배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부 교회가 예배를 강행하면서 관과 교회, 교회와 지역주민이 갈등을 빚고 더 나아가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도 보인다. 이들 교회는 더 나아가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가로막는다는 견해를 내놓고도 있는데, 경제활동의 어려움과 물리적 거리 두기의 피로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예민해진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주일예배는 정말 어떤 상황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인가. 일시적 예배 금지는 정말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더 나아가 종교를 탄압하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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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코로나19의 확산 예방을 위해 국가는 종교단체에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행정명령을 집행하여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권고로써 해결하지 못해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일시적인 불가피한 최소한의 조치임을 교회 측에서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아울러 종교인들의 신앙을 건드리는 불가피한 조치인 만큼 국가도 늘 최대한의 감수성을 갖고 자신의 조치를 돌아봐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상대적 자유’인 종교행사를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제한하는 것은 본질적이고 절대적 자유인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부모의 종교적 신념이 수혈에 반대하는 입장일지라도, 미성년자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수혈하는 것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 종교백화점과 배타주의

오늘날 우리는 다문화사회의 한 요소인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백화점’과 같은 사회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각 종교가 이웃을 배려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하지만, 현실은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을 배려하고 존중하기보다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참되고 옳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배타주의를 더 많이 목격하게 된다. 극단적인 종교 배타주의는 자신과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을 죄악시하거나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폄하한다. 더 나아가 다른 종교적 신념을 나타내는 그림이나 조각물들을 파괴하거나 모독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종교적으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이나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극도의 종교적 피로감과 함께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 더욱이 개인 차원을 넘어서 요즘과 같이 감염병이 위중한 상황에서 교회에 모여 예배하기를 고집하면서 드러나는 종교적 반감은 생각보다 종교가 사회에서 역기능으로 작용할 우려가 높다. 자신이 믿는 신념이나 종교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문화, 다인종, 다종교 사회에서 사회통합의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코로나19가 우리 지역사회에 폭증했던 지난 3월은 그리스도교 전례력으로 사순시기 혹은 고난시기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까지 수난의 시기를 보내야 했던 시간을 기리며, 교회는 예수의 죽음에 담긴 뜻을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올해는 사랑해야 할 이웃과 거리를 두는 것이 최상급의 이웃사랑이 되어버린 이 역설 속에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마태 12, 7)”라는 말의 의미를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른 척하지 않기 바란다. 이제 실천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웃을 불안과 위험으로 몰아넣으며 예배를 강행하는 현재 상황이 종교적 가르침을 따른다기보다 종교단체의 집단적 이익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면 종교의 자유에도 책임이 따른다.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종교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일상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가 일요일 하루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만 ‘기호식품’처럼 취하며 익숙한 전례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하루라도 ‘우리 종교’ ‘우리 교회’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을 버리고, 이웃과 사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실천하려 한다면 한발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리지 않고 기도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이런 감염병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동의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런 신을 믿고 싶지 않다.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신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다.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데우스 논 인디제트 노스트리, 세드 노스 인디제무스 데이)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필요로 하는 신을 옹졸하고 쪼잔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필자 한동일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 2020](4)예배 강행은 신의 뜻? 신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을 겁니다

한국인 최초·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 서강대학교에서 진행한 라틴어 강의는 타 학교생 및 외부인까지 청강하러 찾아오는 최고의 명강의로 평가받은 바 있다. <그래도 꿈꿀 권리> <라틴어 수업> <법으로 읽는 유럽사> <로마법 수업> <카르페 라틴어 한국어 사전> 등을 썼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3280600005&code=940100&s_code=ac293#csidxfc5ead56d0a1fd581390be7f4f4e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