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예수를 믿는다면 교회 문을 열라(2020년 3월 7일)

divicom 2020. 3. 7. 11:28

남이 쓴 글에서 제 생각과 비슷한 생각이나 제 마음 같은 마음을 발견하면 

신기하고도 반갑습니다. 여러 해 전 폴 오스터(Paul Auster)의 <팀북투(Timbuktu)>를 읽으며 

여러 군데에서 제 생각과 같은 생각을 만나 기쁨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오늘 경향신문에서 만난 글에도 제 마음 같은 마음이 보여 아래에 옮겨둡니다.

2012년 초쯤, 그때도 세상이 몹시 소란해서 이 블로그에 '묵언'이라 써놓고 침묵에 들었는데

오늘 이 글의 문패에도 '묵언'이 들어가 있네요.  


[김택근의 묵언]저기 병든 자들이 있다, 교회 문을 열라

김택근 시인·작가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코로나19 창궐이 마귀의 짓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마귀는 쫓지 못하고 ‘박근혜 시계’를 찬 채 큰절로 용서를 빌었다. 그렇게 스스로가 세상의 바이러스임을 인정했다. 그는 ‘평화의 궁전’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평화는 결코 거창한 궁전에 깃들지 않는다. 결국 그는 예수 이름을 파는 속세의 노인이었다.

[김택근의 묵언]저기 병든 자들이 있다, 교회 문을 열라

기성교단은 당장 사이비집단 신천지를 해체시키라 야단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 특히 대형교회는 이단 논란에서 자유로운가. 한국 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에는 별난 것이 있었다. 바로 종말론 설파, 개인숭배, 주술적 종교의식, 헌금 강요 등이다. 이러한 물질만능주의, 권위주의, 신비주의를 청산했는가. 아니다, 여전히 세속적이다.

목사가 앞장서 잘살아보자고 외치고 있다. 교회 다니면서 소원성취 못하면 믿음이 없는 거라고 몰아친다. 당연히 교인 간에도 빈부의 차별이 존재한다. 으리으리한 성전에서는 여전히 돈 냄새가 난다. 우렁찬 아멘 소리로도, 향기로운 찬송으로도 지울 수 없다.

교인들도 기복신앙에 빠져 있다. 돈 많이 벌고, 자식이 성공하고, 건강해서 오래 살게 해달라 빈다. 헌금 액수를, 통성기도의 부피를 헤아린다. 교회에 바친 게 많다보니 예수와 성경보다는 목사와 교회를 믿는다. 목사는 어서 천국행 티켓을 예약하라고 하늘을 가리키고 교인들은 박수치며 아멘을 외친다.

예수는 부흥사도 혁명가도 예언자도 아니었다. 가장 소박한 인간으로 살았다. 평생 가난한 사람과 함께 지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일렀다. “가지지 말라.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그럼에도 요즘 교회들은 가난을 잃어버렸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가난한 사람을 중심에 두고 섬겼던 부활의 예수가 아니다. 자기들 취향대로 만들어낸 다른 신, 곧 우상이다. 성전에 정작 예수는 계시지 않는다. 가룟 유다만이 예수를 팔아넘긴 것이 아니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기도 속에 어찌 예수께서 임할 것인가. 하늘 향해 떼를 쓰는 통성기도를 주께서 기쁘게 받으시겠는가. 예수는 그런 기도를 가르친 적 없다. 주의 기도문에는 나 하나만을 위한 기도 말이 없다. 나 아닌 우리의 기도이다. 기도는 골방 같은 곳에 숨어서 하고, 금식할 때는 머리를 단정히 빗어 남에게 티를 내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에 어찌 ‘나만을 위한’ 특혜가 있겠는가.

코로나19의 습격에도 주일 교회예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무리가 있다. 성경을 펼쳐보라.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을 고쳤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주일예배를 쉬는 것은 이웃을 배려하는 또 다른 예배이다. 대신에 한국 교회가 치유의 예수를 믿는다면 교회 뒷문을 열어 병자들을 가만가만 불러들여야 한다. 지금 병상이 모자라 바이러스 감염 환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럼에도 왜 교회는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가. 모든 섬김의 시설들을 티내지 말고 내어주라.

예수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로마 군인 백부장 부하의 병도 고쳤다. 로마 군대는 유대민족의 원수였건만 중풍을 낫게 했다. 목숨은 누구라도 귀할 뿐이다. 주님의 성전이라면 가장 약한 자들을 뉘어야 한다. 그러면 주께서 얼굴을 펴시고 치유의 은혜를 주실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다. 길이고 진리며 생명이니 어찌 현실을 회피할 것인가. 가장 약한 자들에 둘러싸여 회당이 아닌 세상 속에서 살았다. 이웃을 사랑함이 곧 예수를 사랑함이다. 사랑은 머리가 아닌 실천하는 몸에서 나온다. 예수처럼 십자가를 질 엄두도 낼 수 없는, 성경 밖에서 사는 목회자들은 성경이 가장 두려울 것이다. 사이비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마태복음 25장 40절)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3062039005&code=990100#csidxbb9d82b40dec61ea21c19dc6cdbaee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