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을 흔히 '교사'와 '반면교사'로 나눕니다.
남들이 그를 보고 '저 사람처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하면 '교사'이고
남들이 보고 '저 사람처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하면 반면교사이겠지요.
제 눈이 나빠서인지 교사들보다 반면교사들이 더 자주 보입니다.
나쁘고 천한 언행을 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 사람처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사회는 '긍정 강박' 사회입니다. '하지 말아야겠다'보다 '해야겠다'를 좋아합니다.
소위 '긍정적' 태도, 즉 무엇 무엇을 해야겠다, 무엇 무엇이 돼야겠다는 마음가짐을 독려합니다.
서울대학에 가고 공무원이 되고 돈을 많이 벌고 건물주가 되고 좋은 차를 사고...
지금 이 사회엔 그런 긍정적 태도가 팽배한데 사람들은 왜 부정적 기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긍정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과 그 태도로 뜻을 이룬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격과 생활을 개선하려면 '해야겠다' 식의 긍정적 태도보다 나쁜 짓, 나쁜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우선돼야 할 겁니다. 미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 게 사랑보다 우선돼야 하는 것처럼.
오은 시인의 통찰이 돋보이는 글 --"하지 말아야겠다"--을 아래에 옮겨둡니다.
[문화와 삶]하지 말아야겠다
“꽃을 잡아당기면 못써.” 근린공원에서 산책 중에 엄마가 아이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옷소매만 잡아당겨도 아프잖아. 꽃은 얼마나 아프겠어.” 아이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졌다. “미안해, 꽃아.” 오열하며 사과하는 아이 옆을 지나치는데 가슴이 뭉근하게 끓기 시작했다. 아이는 집에 가서 꽃을 잡아당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사는 동안, 무심코 꽃을 잡아당기거나 꺾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을 괴롭히려고 할 때마다 옷소매를 떠올리며 도리질을 할 것이다.
저녁 약속이 있어 버스를 탔다. 퇴근 시간 전인데도 버스 안은 북적였다. 버스 뒤편으로 이동하다 한 중년 남성이 버스 안쪽을 향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구두 밑바닥에는 진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그 바람에 버스 안에서 병목현상 비슷한 것이 일어났다. 다리를 피해 뒤로 이동하다가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 벌어졌다. 서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얼굴을 찌푸렸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만원버스 안에서 겨우 자리를 잡아 봉을 붙잡고 서 있었다. 버스가 정차하고 출발할 때마다 봉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군가 균형을 잃기라도 하면 버스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명절이 코앞이라 사람들의 손에는 사과 상자, 김 선물 세트, 과일주스가 든 유리병, 고기가 든 비닐봉지 등이 들려 있었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상상을 하니 아찔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경적 소리를 들으며 다짐했다. 버스에서 다리를 꼬고 앉지 말아야겠다. 설사 만원버스가 아닐지라도 누군가의 잠재적인 여유를 앗아가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회사에서 일사분기에 특정 주제를 가지고 워크숍을 하는데, 그때 강연을 부탁한다고 했다. 상대방의 공손하면서도 분명한 태도에 마음이 기울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의 호탕함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불안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잘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수락한 이상,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게 나의 도리일 것이다. 뽀드득뽀드득 그릇을 소리 나게 닦으며 다짐했다. 어떤 제안이든 곧바로 수락하지는 말아야겠다. 생각해본 후 연락을 드린다고 정중하게 말해야겠다.
그날 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탔다. 약 스무 개의 정거장 동안 서서 갈 생각을 하니 타기 전부터 피로했다. 종일 돌아다니며 에너지를 소진한 상태였고, 내게는 엉겁결에 생긴 한라봉 상자까지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탑승한 열차에는 선반이 없었다. 작년 여름에 미관상으로 좋고 유실물도 줄일 수 있어 지하철 선반이 사라진다는 뉴스를 접했었는데, 무거운 짐을 들고 타게 되니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별수 없이 한라봉 상자를 좌석 옆에 세로로 세워두었다. 최대한 부피를 줄여야 한 사람이라도 더 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서 있는 곳 바로 옆은 임산부 배려석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지금껏 거기에 비(非)임산부가 앉아 있는 것만 봐 온 터라 기분이 좋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쳐 보였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임산부 배려석에는 앉지 말아야겠다, 객실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임산부가 앉을 수 있도록 상징적으로 비워둬야겠다. 금방이라도 힘이 풀릴 것 같던 두 다리가 곧게 펴졌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리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할 것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상식 밖 행동을 보고 상식적인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하는 과정이었다. 친구에게 말했더니 대뜸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어른이 되려고 그러니?” “아니. 해로운 어른은 되지 않으려고.”
'동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주 연구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복제 성공(2020년 1월 29일) (0) | 2020.01.29 |
---|---|
설날: 시간을 '뒤적이다' (2020년 1월 25일) (0) | 2020.01.25 |
'안태근 무죄', 대법원 유죄 (2020년 1월 21일) (0) | 2020.01.21 |
오세철 교수의 <코뮤니스트> (2020년 1월 18일) (0) | 2020.01.18 |
오세철 교수의 <실천> (2020년 1월 17일) (0) | 2020.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