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살아온 시대 중 지금처럼 나이 차이에 민감한 때는 없었습니다.
몇 년 생이냐고 하면 '빠른 90이에요' '늦은 95에요' 하는 식으로 답변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많지도 않은 나이인데 한 해를 두고도 '빠른'과 '늦은'을 들먹이며 차이를 강조하니 실소가 나옵니다.
항렬의 순서에 적용되는 '장유유서'가 어쩌다가 나이에 적용되게 되었을까요?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닌 저절로 주어지는 나이가 왜 권력 노릇을 하는 걸까요?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장유승 씨가 재미있고도 중요한 관련 글을 썼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역사와 현실]장유유서(長幼有序)의 오해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우리나라 사람들, 나이를 많이 따진다. 학교는 한 살 차이로 학년이 달라지니 그렇다 쳐도, 직장은 엄연히 직급이 있는데도 나이를 따진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 나이부터 확인하고, 모르는 사람과 싸움이 붙어도 반드시 나오는 말이 “너 몇 살이야?”다. 나이차가 많으면 모를까,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사람들도 나이를 따진다. 이로 인해 세대 간 갈등은 물론 세대 내 갈등까지 빚어진다. 노인끼리 나이를 따지며 노약자석을 다투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청년들도 나이에 민감하다. 취업시장에서는 한 살이라도 어려야 유리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나이 많은 신입사원을 꺼리기 때문이다. 중장년층의 재취업이 어려운 것도 나이 따지는 문화 때문이다.
나이 따지는 문화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것이 ‘장유유서’다. 나이순으로 서열을 정하는 유교적 잔재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하여간 나쁜 건 전부 유교적 잔재란다.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유교적 잔재 탓으로 돌리는 건 게으른 사회학자의 핑계에 불과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유유서는 나이와 무관하다.
장유유서는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먼 옛날 순임금이 다섯 가지 유형의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제시했다. 부자유친은 부자관계, 군신유의는 상하관계, 부부유별은 부부관계, 붕우유신은 수평관계, 그리고 장유유서다. 장유유서는 어떤 관계에 적용되는 윤리일까? 형제관계, 조금 더 확대하면 친족관계의 윤리다. 사회윤리가 아니라 가족윤리라는 말이다. 그러니 장유유서를 찾고 싶으면 집에 가서 찾든가 명절에 친척들 모인 자리에서 찾는 것이 좋겠다.
과거 지역사회는 대부분 집성촌이었다.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들이 한 마을에 살았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순서가 있어야 하는 법,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여 순서를 정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뭘까? 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종법(宗法) 질서가 지배하는 유교사회에서는 숫자에 불과한 나이 따위를 기준으로 위아래를 정하지 않는다. 장유유서는 소목(昭穆)의 순서, 쉽게 말해 항렬의 순서다. 나이 어린 삼촌을 어른 대접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사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이라면 대체로 나이와 항렬이 일치하므로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돈의 팔촌까지 함께 사는 마을에서 나이순으로 위아래를 정하면 순서가 꼬인다. 속된 말로 ‘개족보’가 되는 것이다. 유교적 관념으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태다. 유교사회에서는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따지는 건 항렬의 상하와 적서(嫡庶) 여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어린이를 존대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취학연령도 취업연령도 없었던 과거에는 나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끼리도 나이가 제각각이었다. 과거에 합격한 나이도, 처음 관직에 오른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자연히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로 지냈다. 역사에 길이 남은 ‘절친’들도 나이차가 제법 많았다. 함께 공놀이하던 김유신과 김춘추는 일곱 살 차이, 동문수학한 정몽주와 정도전은 다섯 살 차이, 오성과 한음으로 알려진 단짝 이항복과 이덕형도 다섯 살 차이다. 지금이라면 친구로 지내기 애매하겠지만 그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친구도 드물지 않았다. 옛날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한두 살 차이까지 따지는 엄격한 장유유서 문화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은 우리처럼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이 따지는 문화의 원흉은 유교 아닌 다른 데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이 따지는 문화는 전근대적 유산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적 학제의 도입은 취학연령과 교육과정을 법제화했다. 모든 학생이 같은 나이에 입학해서 정해진 기간 동안 공부하고 같은 나이에 졸업했다. 자연히 취업과 결혼, 승진과 정년에 적합한 나이도 대충 정해졌다. 제 나이에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면 성공한 인생이고, 따라가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다. 나이에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는 인생에서 나이는 사회적 서열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결국 나이 따지는 문화는 서열에 민감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서열이 자주 바뀌면 덜 민감하겠지만, 한 번 정해진 서열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월반과 유급이 사라진 학교, 능력과 성과보다 근속연수가 중요한 직장, 개성과 다양성을 무시하고 획일화를 지향하는 사회, 이것이 나이 따지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원숭이 무리조차 서열이 자주 바뀌는데 그보다 높은 잠재력을 가진 인간의 서열이 바뀌지 않는다면 문제다. 서열이 고착화된 사회는 병든 사회다. 서열을 없앨 수 없다면 최소한 바뀌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서열 변화를 반기기보다는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나이 따지는 문화가 불만이라면, 엄한 유교를 탓하기 앞서 우리 사회가 교육과 노동의 전면적인 변화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는 것이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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