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연필과 만년필(2018년 10월 3일)

divicom 2018. 10. 3. 21:21

저는 연필을 좋아합니다.

뭔가를 쓰기 전 연필을 깎다 보면 먹을 갈 때처럼 

마음이 안정되고 흐뭇합니다.

 

한때는 만년필을 즐겨 썼는데 요즘은 쓰지 않습니다.

잉크를 아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잉크를 아끼려고 만년필을 쓰지 않다가 한 번 쓰려 하면

만년필의 입이 말라 잉크가 잘 나오지 않을 때가 많고

잉크를 나오게 하기 위해 물을 묻히고 어쩌고 하며 

꽤 긴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습니다.


볼펜의 잉크나 만년필의 잉크나 

글씨를 쓰면 잉크가 없어지는 건 마찬가지인데도

만년필의 잉크는 누군가의 피처럼 생각되어 막 쓸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의 시인 예세닌이 홀로 죽기 전 잉크가 없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내어 

그것으로 마지막 시를 썼다는 글을 읽고 나니

잉크가 더욱 피처럼 느껴집니다.


또 한 가지 만년필의 사용을 막는 것은

만년필로 쓴 글이 오래 남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연필로 쓴 것이 가장 먼저 사라지고

볼펜으로 쓴 것이 그 다음, 만년필로 쓴 것이 가장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내가 휘갈겨 쓴 글들이 세상에 떠돈다는 것...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아래는 지난 9월 28일자 경향신문 '여적' 칼럼에 실린 만년필에 관한 글입니다.

  


여적]조인식 펜

이중근 논설위원

역사상 만년필이 가장 주목받은 장면은 1945년 9월2일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이다. 이날 도쿄만에 떠 있는 미 해군 미주리 함상의 녹색 테이블 위에서는 만년필의 향연이 펼쳐졌다. 먼저 일본 측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우메즈 요시지로 사령관이 서명에 나섰다. 두 사람은 데스크 펜을 외면하고 만년필로 서명했다. 이어 연합군 대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한 움큼 꺼내더니 두 권의 항복문서에 사인해나갔다. 처음 사용한 두 자루는 뒤에 서 있던 미군과 영국군 장군에게 건넸다. 이어 두 개의 펜으로 추가 서명한 뒤 마지막으로 그 유명한 파커사의 듀오폴드 오렌지 만년필을 집어들었다. 작가인 아내 진 맥아더가 20년 동안 사용한 펜을 빌려와 서명식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선글라스와 파이프로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 줄 알았던 맥아더다운 연출이었다.

만년필이 조인식에 쓰인 것은 편의성 덕분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인 서명에 쓰이다보니 펜에 상징성이 부여됐다. 시게미쓰 외상은 항복문서에 미제 만년필로 서명했는데 직후에 불태웠다고 한다. 항복에 대한 일본인들의 정서가 투영된 미확인 전언이다. 파커사가 태평양전쟁 종전 50주년을 기념해 맥아더의 듀오필드 만년필을 복제한 것도 이런 상징성에 기댄 흥행술이다. 1997년 임창렬 부총리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때 몽블랑으로 서명했다가 구설에 오른 것도 마찬가지다. 2016년 콜롬비아 내전 종식 서명식에 총알과 탄피를 녹여 만든 펜이 쓰인 것처럼 지금도 특별한 의미를 담은 펜들이 제작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조인식에 사용한 펜을 두고 말이 많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몽블랑으로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했는데 문 대통령은 문구점에서 파는 네임펜을 썼다는 것이다. 엊그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자유무역협정에 흔하디흔한 유성펜으로 서명한 뒤 이를 문 대통령에게 건넨 것을 두고는 외교결례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디지털시대에 펜 종류를 가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역사적 서명에 특별한 의미를 담은 펜을 써 길이 남길 필요는 있다. 남북통일 협정문을 평범한 펜으로 서명한다면 허전할 것 같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9272053005&code=990201#csidx04f91bd16d3daf58d67dd957d823f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