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김수영은 살아있다(2018년 8월 31일)

divicom 2018. 8. 31. 17:40

대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소개할 시를 고르다가 

김수영(1921-1968)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1965년에 발표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골랐습니다.

쉰 세 살 먹은 시를 열아홉 살, 스무 살 학생들에게 소개하려는 건

그 정도 시차쯤은 훌쩍 뛰어넘어 공감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수영 시인이 저 세상으로 간 지 그새 50년이 흘렀지만

그의 시집이 늘 손닿는 곳에 있어서인지 그가 죽었다는 게 아직도 실감나지 않습니다.

아래에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전문과, 오늘 경향신문 '여적'칼럼에 실린 김수영 관련 글을 옮겨둡니다.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三十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원 때문에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나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시선: 거대한 뿌리>




[여적]작고 50년, 김수영 시인은 살아있다

조운찬 논설위원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 버렸다’(시 ‘말’의 부분)

김수영의 시에 죽음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다. 평론가들은 1964년 쓰인 시 ‘말’을 본격 죽음을 파고든 작품으로 본다. 시에서만 그랬던 게 아니다. 부인 김현경씨는 김수영이 책상 달력에 ‘상왕사심(常往死心)’이라는 좌우명을 써놓았다고 증언했다.(<김수영의 연인>)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는 뜻이다. 김수영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징집돼 북한에서 강제 노동을 하는 등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인민군에서 탈출해 서울까지 왔으나 다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고 만다. 이 와중에 두 동생은 행방불명됐다. 

김수영에게 전쟁을 통한 죽음의 공포 체험은 시를 쓰게 하는 원천이었다. 평론가 김종철은 “죽음에 대한 남다른 인식으로 일상의 피상적인 경험의 갈래를 좇아 허우적거리지 않고 여러 경험의 의미를 근본에서 꿰뚫어 볼 수 있게 했다”고 진단했다. 시인 황규관은 <리얼리스트 김수영>(한티재)에서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시적 사유를 감행하면서 죽음은 삶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삶은 죽음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김수영에게 ‘죽음’은 종결이 아니라 삶을 삶답게 하는 근거였다. 

죽음을 통해 생명의지를 노래했던 시인은 1968년 6월16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48세. 그러나 너무도 풋풋하게 젊음과 자유를 노래한 탓인지 그의 죽음은 김소월보다도 더 때이른 요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김수영은 우리 시대 최고의 시인이다.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38선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다’. 그의 시와 산문 한줄 한줄은 읽는 이를 벌떡 일어나게 한다. 그의 영향력은 문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철학·역사 분야의 학제 간 연구도 활발하다. 작고 50주기를 맞은 올해는 더욱 풍성하다. <김수영 전집> 결정판이 출간됐고 시집 <달나라의 장난> 복각판도 나왔다. 시인이 중퇴한 연세대는 31일 명예졸업장을 수여한다. 오는 11월에는 학술대회도 열린다. 50주기라지만, 김수영은 살아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302053025&code=990201#csidxc169d16d95a432498f0e150f8cb1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