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김미림 씨가, 제가 작년 2월에 자유칼럼 (www.freecolumn.co.kr)의 '김흥숙 동행'에 썼던 글,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읽고
이메일을 보내주었습니다. 글도 사람 같아 써 보내고 나면 잊기 십상인데 미림 씨 덕에 다시 읽어 봅니다. 지난 3월 자유칼럼을 떠나 의무 하나가 줄었으나, 마음이나 세상이나 어찌 꼭 그 때 같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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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가졌는가' (자유칼럼 2009년 2월 6일)
날씨도 사람을 닮는다더니 안개 낀 서울은 자꾸 어두워지는 마음을 닮았습니다. 이런 날 집에 있으면 아주 눕게 됩니다. 마침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함석헌 선생 서거 20주기와 마하트마 간디 서거 61주기를 추모하는 학술모임이 열린다니 그리로 향합니다.
버스는 철거와 재개발이 한창인 가재울 뉴타운을 지나갑니다. 대낮인데도 굳게 닫친 셔터엔 검고 붉은 스프레이로 그린 X자가 무섭고, 뜯기다 만 벽, 유리창이 사라진 건물들이 퀭한 눈으로 서 있는 한쪽에선 작은 가게들이 아직 영업 중입니다. 자연히 용산 철거민 참사의 희생자들과 검은 치마저고리 차림의 유족들이 떠오릅니다.
1966년 ‘사상계’ 3월호 권두에 “항거할 줄 알면 사람이요, 억눌러도 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 아니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항거는 참 항거가 아니요, 대중이 조직적으로 해서만 역사를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끄는 참 항거이다.”라고 썼던 함석헌 선생이 오늘 서울에 계셨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봅니다. 간디처럼 비폭력 저항을 주창하여 ‘한국의 간디’로 불리던 분이니 화염병을 던지진 않으셨을까요? 우리나이 19세에 3.1 운동에 참여한 이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지칠 줄 모르고 저항하다 투옥을 일삼던 분이니 가만히 계시진 않았겠지요?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 바닷가 원성목에서 태어나 1989년 2월 4일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함 선생과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 해안의 포르반다르 (Porbandar)에서 태어나 1948년 1월 30일에 암살을 당한 간디, 두 선인들은 출생지가 바닷가라는 공통점 외에도 삶에 대한 태도와 방식에서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 닮은 점이 오늘 모임의 주제일 겁니다.
모임이 열리는 지하1층 대강당, 벽을 따라 서있는 책꽂이의 빼곡한 책들 중에서도 김병희 편저 ‘씨알소리소리 함석헌’이 눈을 끕니다. 아시다시피 곡식의 낟알이나 과일, 생선 등의 크기를 뜻하던 ‘씨알’이란 말이 함 선생 덕에 백성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함 선생은 ‘씨알’의 ‘알’자를 쓸 때 ‘ㅇ’ 아래에 마침표를 찍은 ‘아래 아’를 쓰셨지만 컴퓨터 자판엔 ‘아래 아’가 없어 그냥 ‘씨알’로 표기해야 하니 안타깝습니다.
무심코 펼쳤는데 하필 글 쓰는 사람들을 향한 일갈입니다. “隔靴搔癢(격화소양)이라, 신 위를 긁는다는 말이 있다... 요새 글 쓰는 사람들 보면 어찌 그리 신은 것이 많은가? 양말 신고 구두 신고 덧구두 신고 그 위를 긁는 것 같은 글뿐이다. 그러면 시원하긴 고사하고 더 가려워. 예배당 절간에 아니 가려는 것이 웬 까닭인지 몰라? 신문 잡지 보다가 내팽개치는 것이 무슨 때문인지 몰라? ... 이 씨알의 가려운데 말 못할 속의 가려운 데를 시원히 긁어 노래가 나오게 할 예술가 평론가는 아니 오려나? 신을 좀 벗으려므나?”
선생은 자신의 글에 대해서도 조롱을 아끼지 않습니다. “글이라고 쓸 때는 있는 맘껏 다해 쓰노라 하여도 써놓고 보면 이거 내 소리냐? 하고 찢어버리고 싶지 않은 글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역시 이날껏 글 쓰고, 찢지 않고, 돈 받는 것이 나의 나밖에 못되는 설움이 있는 것이다. 감옥에서 나와서는 또 도둑질을 하는 상습범,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는 또 민중의 피 빨아먹는 살림을 다시 하고 다시 하는 성당 예배당 절이라는 감옥에 있는 상습범, 신문 잡지를 보고는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또 나라의 것을 도둑질해 먹는 정부관청이라는 엄지 감옥에 있는 상습범, 그것들도 나 같아서 그러겠지. 너나 나나 가엾은 존재들이로구나!”
선생의 힐난이 부끄러워 슬며시 책을 덮습니다. 연단에선 논문 발표가 한창입니다. 이치석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은, 선생은 학교체제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면 부정하셨으니 공교육 혁명가라며 함석헌전집 2권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졸업장이 있어야 출세한다는 사회제도 때문에 학교가 있는 것이지, 결코 학교가 아니고는 사람이 될 수 없다 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장이지 학교가 아니다. 거기서는 아동이라는 원료를 넣고 교사라는 기술직공이 교수라는 기계작업을 하면 다수의 제품이 나온다. 그러면 일정한 자격이 있어서 거기 맞으면 상품으로 나가고 맞지 않는 것은 아낌없이 내버림을 당한다. 공장주는 채산이 목적이지 그 개체의 운명은 문제로 삼지 않는다.” 50년 전 말씀이 오늘에 더 잘 맞는 것 같으니 비감합니다. 젊은이들이 들으면 환호할 테지만 젊은 얼굴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법무법인 민중의 박종강 변호사가 전해주는 간디의 “내가 꿈꾸는 인도”는 서글픔을 자아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도 이것은 우리나라라고 생각하고 그 나라를 만들어 가는데 자신도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인도를 위해 일할 것이다. 그 인도에는 상류계급도 하류계급도 없다. 그 인도에는 모두가 화목하게 산다.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세계 누구와도 평화롭게, 착취하는 일도 착취당하는 일도 없기에 군대는 가능한 소수로 둘 것이다. 대중의 이해를 위반하지 않는 한 외국인이나 국내인이나 차별 없이 존중될 것이다.” 간디의 꿈은 아직 우리의 꿈입니다.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 원장인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에 대한 선생의 탄식을 들려줍니다. “간디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얻은 좋은 인상의 하나는 그 인맥의 장관이다... 한편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또 한편 가슴속으로 흘러드는 눈물을 금치 못했다. 우리 인맥의 너무도 낮고 적음을 한해서 말이다... 오늘 우리같이 인물이 필요한 때는 없는데 인물이 없다. 특히 정치에서 그렇다. 왜 그런가? 재목은 숲에서만 난다면 인물은 인물에서만 난다. 전에 인물이 없었는데 지금 어디서 인물을 구하겠나?”
함 선생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억울하게 사형당한 인물들 (묘청, 최영, 임경업 등), 제거된 개혁파 인물들(조광조, 남이), 지조를 지킨 인물들(정몽주 등 사육신)의 전기집이나 같다는 게 김 교수의 생각입니다. 김구, 여운형, 조봉암, 장준하 등 해방 후 죽임을 당한 큰 인물들이 살아서 제 몫을 했더라면 오늘 이 나라가 달랐을 거라는 겁니다.
도서관 밖은 여전히 우울한 2월입니다. 간디는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그의 생일은 인도에선 국경일로 세계적으로는 ‘국제 비폭력의 날’로 기념되지만, 함석헌을 아는 젊은이는 이 나라 안에도 드뭅니다. 인물은 없고, 교육은 공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격차는 벌어지고, 모두가 화목한 우리나라는 꿈에서조차 그려보기 힘든데 저는 신발 위를 긁는 것 같은 글이나 쓰고 있습니다. 자괴감은 지대하나 비겁이 체질화되어, 집으로 갈 때는 가재울 뉴타운을 피해 가야지 생각하는데 선생의 목소리가 죽비 되어 머리를 내려칩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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