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로댕과 클로델 (2010년 6월 23일)

divicom 2010. 6. 23. 23:30

선배님이 주신 초대권 덕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로댕 회고전'에 다녀왔습니다. 8월 22일까지라고는 하나, 각급학교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미술관이 마트처럼 붐비고 소란스러울 테니 미리 간 것이지요. '신의 손'을 비롯해 '생각하는 사람,' '입맞춤' 등 대리석, 석고, 청동으로 만든 180여 점의 조각과 드로잉 작품들 사이를 걸었습니다. 다리가 아프고 눈도 충혈되었지만, 마음은 행복하게 일렁였습니다. 로댕의 작품들을 직접 접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책에서만 보던 걸작들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게 해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고마웠습니다.

 

주최측이 마련한 팸플릿에는, 오랫동안 공공기념물의 장식품으로 전락했던 조각을 순수창작 미술의 독립적 분야로 이끌어낸 사람이 로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19세기 서양미술 회화 분야는 인상파 화가들의 등장으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각은 회화와 달리 건축물의 부속품 정도로 여겨져 조각 고유의 예술적 가치는 찾기 어려운 시점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1840년 11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하급관리의 아들로 '천재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태어난다. 어린 시절 글을 읽고 쓰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었던 로댕은 14세에 비로소 예술가가 되기 위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온종일 미술공부에 매달린다. 우연히 조각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로댕은 '난생 처음 점토를 본 나는 천상에 오른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밝히며 진정한 소명이 조각임을 확신한다."

 

그런 로댕이었지만 조각가로 처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건 37세나 되어서였으며, 그것도 칭찬을 들은 것이 아니고 비난을 들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선보인 작품 '청동시대'가 그 사실적인 묘사 때문에 '모델의 몸에서 직접 주물을 뜬 작품'이라는 논란에 휩싸이게 된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인체 조각 작품들을 보니 저 속에 사람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입맞춤'과 '생각하는 사람'을 비롯한 석고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석고가 저와 만났을 땐, 오직 금 간 뼈나 늘어난 인대를 바로 잡기 위한 재료로만 쓰였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로댕의 작품들 모두 경이롭고 감동적이었지만, 저를 더욱 세게 끌어당긴 건 몇 개 되지 않는 까미유 클로델(1864~1943)의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녀가 만든 '로댕의 초상'과 '왈츠'는 꼭 한번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청동으로 표현한 '왈츠'를 보고 있으면 여인의 드레스가 움직일 때 일어나는 바람까지 느낄 수 있으니까요.

19세에 로댕을 만나 그의 조수가 되고 모델이 되고 연인이 되었으나, 자신만의 천재적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클로델, 그녀가 자신의 혼이 담긴 무수한 작품들을 파괴하고 결국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로댕 전시회에 가서 로댕과 클로델의 작품들을 본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지만, 전시를 본 후에 지친 다리와 눈을 쉬고자 미술관 3층의 베이커리 카페에 간 것은 실수였습니다. '맑고 푸른 서울'을 부르짖는 서울의 시립미술관 카페에서 머그잔 대신 일회용 종이컵과 플라스틱컵만을 사용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데다, 그곳의 분위기와 아메리카노 커피는 전시장에서 막 보고 나온 명작들의 여운을 지울 정도로 수준이 낮았습니다. 다음에 또 그 미술관에 가게 되면 좀 더 나은 분위기에서, 제대로 된 용기에 담긴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