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 즐거운 산책

아버지, 세탁기, 아이 캔 스피크,정글의 소금(2017년 9월 24일)

divicom 2017. 9. 24. 11:10

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이 되는 날... 가족들은 모두 유택을 찾아갔지만 

저는 몸과 마음이 오히려 발을 잡아 가지도 못했습니다. 


열에 들뜬 머리로 누웠다 앉았다 하다가 햇빛 선명한 문 밖을 걸었습니다.

하늘은 떠나시던 날처럼 높고 흰구름도 꼭 그때 구름 같았습니다.

'회자정리'요 '생자필멸'이라지만 헤어지는 일, 특히 긴 인연을 접는 일은 참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신 나무는 봄에 꽃 피우는 라일락이었지만 악기는 현악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어쩌면 제가 가을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비올라를 제일 좋아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tbs FM95.1MHz)'의 첫 곡은 바로 그 비올라의 선율을 가을의 노래로 표현하는 

이동원 씨의 노래 '그대를 위한 가을의 노래는' 이었습니다. 어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 이제부터는 밤의 길이가 길어집니다. 낮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밤에 더 잘 되는 일이 있습니다. 길어지는 밤이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농촌이나 도시에서나 고추, 호박, 가지, 고구마 순 같은 채소를 말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빨간 고추 몇 개를 말리고 있는데고추는 초록일 때도 예쁘지만 빨개지면 더 예쁘고

말라갈수록 보석처럼 투명해집니다. 고추처럼 나이 들수록 투명하게 아름다워지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박혜은 맥스무비 편집장과 함께 하는 '영화 읽기'에서는 천재 탐험가 퍼시 포셋의 아마존 탐사를 보여주는 실화 

영화 '잃어버린 도시 Z', 터키 이스탄불에 사는 일곱 마리 고양이와 시민들의 공존을 담은 다큐멘터리 '고양이 케디', 역사상 가장 독특한 영화감독이라는 평을 듣는 데이빗 린치가 직접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 '데이빗 린치: 

아트라이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청문회 현장을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구현해낸 '아이 캔 

스피크'를 소개했습니다. 형편만 허락한다면 모두 보고 싶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전에 나왔던 위안부 피해자 영화들과 달리 2007년 미국 하원의 공개 청문회를 배경으로 한

'휴먼 코미디'라고 합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75대 1의 경쟁을 뚫고 

당선작으로 선정돼 영화로 제작됐다고 합니다.


권태현 출판평론가와 함께 하는 '책방 산책'에서는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와, 집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천착하는 일본 크리에이티브 집단 야도카리의 <3평 집도 괜찮아>를 소개했습니다.


'문화가 산책'에서는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 '정글의 소금',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한강과 마을의 흔적' 전시회, 국립민속박물관과 속초시립박물관이 공동기획해 속초시립박물관에서 열고 있는 

전시 '실향을 딛고 세운 도시, 속초'를 소개했습니다. '정글의 소금' 전시회는 중구 수하동 한국국제교류재단 갤러리에서 10월 18일까지 열리는데. 이 제목은 베트남 소설가 응우옌 휘 티엡의 작품에서 따온 표현으로 30년에 한 번 소금처럼 하얗게 피는 정글 꽃을 뜻하며 자연파괴를 번영으로 착각하는 풍조를 풍자한다고 합니다. 


오늘 '즐거운 산책...'은 '대바라기'라는 우리말로 마쳤습니다. '대바라기'는 '끝물에 따들이지 못해 서리를 맞고 말라 버린 고추나 목화송이'를 뜻합니다. 정성들여 키운 농작물이 '대바라기'가 되지 않고 잘 거둬져서 농부의 보람이 

되고, 먹고 쓰는 사람들의 기쁨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래에 '들여다보기'에서 읽어드린 제 글 '세탁기'를 옮겨둡니다. 오늘 들려드린 노래의 명단은 tbs 홈페이지(tbs.seoul.kr)의 '즐거운 산책...' 방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탁기

 

세탁기가 고장 났습니다.

제조회사에서는 부속이 없어 고칠 수 없다고 합니다.

처음 샀던 세탁기는 이십 년 넘게 썼는데

두 번째 세탁기는 꼭 12년 만에 못 쓰게 된 겁니다.

 

혹시 너무 험하게 써서 고장이 났나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요즘 물건은 예전 것보다 복잡하고 기능이 많은 대신

수명이 짧다고 합니다.

 

가전제품 매장에는 제가 쓰던 것처럼 작은 세탁기는

진열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홀로 사는 사람이 날로 증가하는데

왜 작은 제품은 보이지 않는 걸까요?

 

빨래하느라 아픈 손목에 파스를 붙이자니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세탁기 덕에 아낀 시간과 힘으로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요?

첨단 제품처럼 복잡해진 우리의 나날...

우리는 편해진 만큼 행복해졌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