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광화문 분수 (2009년 8월 5일)

divicom 2009. 10. 31. 11:39

낡은 콘택트렌즈를 바꾸러 종로1가 안과에 갑니다. 한때 높았던 건물이 이제 꺽다리 손자들 사이 키 작은 할아버지 같습니다. 1층 로비 안내원의 무표정도 15년 전 앳되던 렌즈담당자의 친절도 여전합니다. 병원이 아니라 오래된 친구 집입니다. 마침 점심시간입니다. 길 건너 혈관처럼 이어진 작은 골목 켜켜이 수백 개의 밥집이 있으니 그 중 한곳을 골라 들어가야겠습니다.

 

-사라진 골목들-

 

분명히 종로구 청진동, 조선시대 서민들이 세도가들의 말을 피해 들어가 숨던, 즉 피마(避馬)하던 피맛골인데 빼곡하던 빈대떡집, 생선구이집 모두 사라지고 새로 지은 고층건물들이 혼란에 빠진 중년을 내려다봅니다. 언뜻 광화문과 함께 인근 뒷골목도 ‘정비’되었다는 보도가 떠오르지만, 머리보다 의리 있는 발은 새 건물들 사이를 서성입니다. 하늘을 이고 앉아있던 수십 년 전통 해장국집이 20층 건물 1층에 옹색합니다. 자식들 등살에 시골집 포기하고 아파트에 세든 늙은 어머니 모습입니다.

 

밥은 그만두고 광화문으로 갑니다. 종로구에서 18년을 산 제게 광화문은 고향이고 추억입니다. 먼 길 다녀오는 어스름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이면 집에 다 온 듯 마음이 놓였습니다. 길눈은 어두워도 광화문통만은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왕복 차로 6개를 줄여 만든 폭 34미터, 길이 557미터 ‘광화문 광장’이 낯섭니다. 광장 양끝에 폭 1미터, 길이 365미터, 깊이 2센티미터 ‘역사물길’이 그나마 귀엽습니다. 동쪽 물길에는 조선건국부터 2008년까지의 주요 역사가 617개 돌판에 새겨져 있고, 서쪽 물길은 후세가 기록하도록 빈칸으로 두었다고 합니다.

 

낯설다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 결국 적응하게 됩니다. 다만 그 과정이 스트레스를 수반합니다. 사람을 위로하고 안정시키는 건 낯익은 풍경입니다. 유럽의 선진국들이 오래된 건물들을 보존하는 건 그 자체의 가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위한 배려일 겁니다. 언론은 스트레스로 병원을 찾은 사람의 수가 2005년 6만6천 명에서 2008년 10만천 명으로 53% 증가했다고 야단이지만, 저로선 4천 8백만 국민 중에 겨우 10만여 명만이 스트레스 환자라는 게 오히려 놀랍습니다. 올해엔 온 나라가 ‘정비’중이니 환자의 수가 더 늘어날 겁니다.

 

이순신 동상 앞에는 ‘분수12·23’이 있습니다. 원균이 이끌던 조선군이 왜구에 대패한 후 재기용된 이순신 장군이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며 전의를 다졌고 23번 전투를 치러 23번 승리했다는 게 서울시의 설명이지만, 인터넷엔 분수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하필이면 일본 왕의 생일 날짜와 같다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이순신의 승전횟수도 23번이 아니라는 겁니다. 해군교육사령부 부설 충무공리더십센터의 제장명 교수가 2007년 봄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소설과 드라마 등에서 주장한 23전 23승의 근거가 희박”하고,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치른 해전은 총 43회로 38번은 승리했으나 5번은 전과나 피해가 뚜렷하지 않다고 합니다.

 

‘63빌딩’도 있긴 하지만 고유명사가 된 숫자는 ‘6.25’ ‘8.15’처럼 대개 어떤 사건을 나타냅니다. 네 개의 숫자는 기억하기도 어렵고 “일이이삼 분수에서 만나자”거나 “십이이십삼 분수에서 만나자”는 건 어색하니 그냥 ‘광화문 분수’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솟구치는 물기둥을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솟아납니다. 저기 섰던 큰 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겨울이 오면 저 분수들은 무엇을 하고 22만여 포기 꽃들로 만든 카펫은 어떻게 될까...

 

-인공적 아름다움-

 

새 렌즈를 끼면 세상이 잘 보이지만 낄 때뿐입니다. 분수의 아름다움은 물을 뿜을 때뿐이고, 꽃 카펫이 아름다운 것도 꽃이 피어있을 때뿐입니다. 470억 원을 들여 광화문 광장을 만든 이유가 무엇이든 부디 잠시 눈 즐거운 인공정원 이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훗날 저 ‘역사물길’ 속에 이 광장이 떳떳한 성취로 기록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