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절친’이 되고 싶은 이 선생께 (2009년 7월 15일)

divicom 2009. 10. 31. 11:35

중학교 학부모모임에서 처음 보았으니 우리가 만난 지 15년이 흘렀습니다. 적어도 500시간을 함께 했지만 시간의 영향은 미미합니다. 부유한 부모덕에 평생 부자로 살고 있는 당신은 요즘 부쩍 노후를 걱정하고, 부자 아닌 부모를 만나 근근이 사는 나는 그냥 어떻게 되겠지 태평합니다. 그날도 당신이 정치 얘기를 꺼내지만 않았으면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된장찌개와 만두를 나눠먹으며 웃고 떠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쁜 짓을 하고도 책임지지 않고 자살한’ 사람을 참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앎과 무지의 기준-

 

‘앎(知)’은 ‘자신이 무엇을 알며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며, ‘모름(無知)’은 ‘자신이 모른다는 걸 모르는 것’이라 하면, 당신처럼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 중에도 ‘무지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소위 일류대학을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무지하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고 하겠지만, 특정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세상이나 세상살이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안타까운 건, 당신이 구독하는 신문의 기사와 논평만을 진실이라고 믿고, 그것을 근거로 사안이나 사람에 대해 신속하게 규정하는 단순함입니다. ‘단순함’은 소녀의 매력일진 모르나 중년의 미덕은 아닙니다. 당신은 자살한 이를 비난하며, 비난하길 거부하는 사람을 좌파라고 했습니다. 좌파와 우파를 결정하는 건 사람들의 ‘배경,’ 즉 경제력이라고도 했습니다.

 

나는 이분법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들을 꼭 좌파와 우파로 나눠야 한다면 그 구분의 기준은 ‘배경’이 아니고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을 자선과 봉사의 대상으로 보아 자신이 가진 것 일부를 나누어 주는 것으로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우파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질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걸 위해 제도를 바꾸려 하면 좌파라는 겁니다.

 

나는 늘 당신을 걱정에 빠트리는 당신의 부(富)를 부러워한 적이 없지만 일 년에 한 번, 워렌 버핏과의 점심을 놓고 경매가 시작될 때만은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지난 달 경매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경제상황이 악화되었으니 경매 낙찰가가 예년에 비해 현저히 낮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5일 후 끝난 경매의 최종낙찰가는 사상 두 번째로 높은 미화 168만 300달러(한화 약 22억 원)였습니다.

 

버핏은 세계에서 제일간다는 투자자이고 둘째가는 부자이지만, 그가 부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당신과 같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존경을 받진 못했을 겁니다. 그는 ‘시장 경제는 부의 쏠림’을 가져온다며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는 사람들을 ‘운 좋은 정자 클럽 (lucky sperm club)’이라 부르고, 상속세를 없애는 건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의 맏아들들로 2020년 올림픽 팀을 짜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당신과 같은 우리나라의 부자들이 세금을 덜 내기 위해 머리를 짜는 동안 버핏은 세금을 더 내게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당신이 보기에 버핏은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

 

-역사 앞에서-

 

우리나라 교육은 오랫동안 의심 없는 습득과 순응을 강조했습니다. 당신은 그 교육이 양산한 인재의 표본이라 할 만 합니다. 지식도 많고 재산도 많지만 노후 걱정에 잠 못 이룰 당신에게 책 한 권을 권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좌우파의 대립 속에서 중도를 지키려 노력하다 39세에 저격당한 김성칠 교수의 ‘역사 앞에서’입니다. ‘한 번도 어느 편이 승세인가’ 따지지 않고 ‘어느 편이 올바른가’ 고민했던 그의 삶에, ‘무엇이 이익인가’를 잣대로 살아온 당신을 비추어보고, 그가 살아보지 못한 노후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부디 지난 500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우리가 ‘절친’이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