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기다리던 9월의 첫날, 날씨는 좋았지만 국회에서는 꼴사나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정세균 국회의장실을 사실상 점거한 것입니다. 정 의장은 정기국회 개회식 연설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랑과 믿음 속에 청와대에 머물고 있는 우병우 민정수석과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반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등을 거론했는데, 새누리당 의원들은 그의 발언이 '정치적 중립 의무'를 저버렸다며 사과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은 다시 한 번 집권 여당이 국민의 마음을 얼마나 모르는지, 아니면 국민의 마음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상식을 가진 국민은 누구나 우병우 수석을 파면하지 않는 대통령을 이해할 수 없고, 국민과 충분한 상의도 없이 사드를 배치하기로 결정하고 이곳저곳을 후보지로 내세워 국민을 성나게 하는 정부에 반발하며, 공수처 설치를 반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을 대변해야 할 국회의장이 정기국회 개회식 연설에서 이런 문제를 언급하는 건 당연하고도
당연합니다. 새누리당이든 어떤 당이든, 모든 국회의원이 해야 할 말을 정 의장이 대변한 것이니 의원들로서는
정 의장의 말에 큰 박수를 보내며 동감을 표시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은 심야에 추태를 벌이며 국회의장의 사과를 요구하고, 국회의장이 사과하지 않자 밤늦게 의장실로 몰려가 의장직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게 갈수록 창피하지만, 그래도 정세균 국회의장 같은 동행이 있어 다행입니다. 국회의원은 행정부
(청와대)를 견제, 독려하며 국민의 뜻을 받드는 직업이지 청와대의 시종이나 대통령의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아래에 정세균 의장의 연설문을 옮겨둡니다. 길이가 길어서 조금 줄였습니다.
말없음표(...)는 문장이 사라졌음을 뜻합니다. 연설문 원문은 아래 주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020034001&code=910100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의원 여러분! 과거 국회운영의 사례를 보면,
여야가 특정사안을 놓고 대치하게 되면 이견이 전혀 없는 무쟁점 민생법안마저도 처리가 불가능한 상황이 종종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30일의 회기 동안 단 한 건의 법률도 처리하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식물국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한 국회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와 관련하여 ‘무쟁점 민생법안’을 제때 처리하는 시스템과 문화가 자리 잡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도적인 방법 이전에 국회의 ‘불문율’로 만들어가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국회의원 표결정보시스템 도입과 무쟁점 민생법안의 합의 처리를 통해 국회운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고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이번 정기 국회부터 실천될 수 있도록 여야 지도부와 의원 여러분의 협조를 당부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의원 여러분! 저는 20대 국회 개원사에서 ‘국민에게 힘이 되는 국회’가 되겠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 국회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오로지 국민을 위해 사용할 때 ‘국민에게 힘이 되는 국회’가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최근 추경안 처리 과정이나 청문회를 둘러싼 여야 갈등, 그리고 청와대 민정수석을 둘러싼 난맥상 등,
일련의 상황들을 접하면서 뭔가 우리 국회와 정치의 권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국회는 여와 야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대표해서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의회 고유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국회가 헌법에서 부여받은 감시와 견제의 역할보다는, 정파적 이해를 우선시했던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편에 서서,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께서 우리 국회를 신뢰합니다.
국회의장을 영어로 ‘Speaker’라고 합니다.
상석에 앉아 위엄을 지키는 Chairman이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Speaker인 것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쓴 소리 좀 하겠습니다.
제 개인의 목소리가 아닌 국민의 목소리라 생각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우병우 민정수석과 관련한 논란은 국민 여러분께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국민의 공복(公僕)인 고위공직자, 특히 청와대 민정수석이라는 자리는 티끌만한 허물도 태산처럼 관리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은 실질적으로 검찰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그 직을 유지한 채, 검찰수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을 국민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저는 최근 우리 사회 권력자들의 특권, 공직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부정과 부패를 보면서 이제 더 이상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수사기관의 신설을 미뤄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오는 9월 28일부터는 일명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됩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친분 관계에 의한 작은 청탁이나 소소한 접대 행위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하물며 고위공직자가 그가 가진 특권으로 법의 단죄를 회피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저는 차제에 특권과 부패 없는 대한민국, 투명하고 청렴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법적 정비가
완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영란법에 이은 ‘고위공직자 비리 전담 특별 수사기관’의 신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야 지도부와 의원 여러분께 당부 드립니다.
이번 정기회의 기간 내에 고위공직자 비리를 전담하는 특별수사기관 설치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의원 여러분!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상황이 매우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북핵문제로 촉발된 국제사회의 제재와 남북 긴장상태 고조, 그리고 이에 맞선 북한의 지속적인 무력시위로
동북아 전체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북핵문제는 동북아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안보와 직결된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당사국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북핵 문제에 대한 해법도 우리가 먼저 만들어야 하고, 그에 따른 대화나 행동도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파국을 막을 수 있고, 또 북핵 문제를 넘어한반도 통일 과정에서의 이니셔티브(Initiative)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사드배치와 관련한 정부의 태도는 우리 주도의 북핵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사드배치의 불가피성을 떠나서 우리 내부에서의 소통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한 주변국과의 관계변화 또한 깊이 고려한 것 같지않습니다.
그런 과정이 생략됨으로 해서 국론은 분열되고, 국민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응분의 제재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남북이 극단으로 치닫는 방식은 곤란합니다.
엊그제 한 일간지 칼럼에서 제재 때문에 무너진 나라는 없으며, 제제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순 없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재는 수단입니다.
때론 유용하지만, 때론 위험한 수단입니다.
중요한 것은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남북의 현실은 마주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위태롭습니다.
우리 국민과 국회가 언제까지 남북한 정부가 벌이는 치킨게임(Chicken Game)의 관망자로 남아있어야 합니까.
한반도에서의 긴장 고조는 동북아 지역 평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작은 것이라도 가능한 부분부터 대화해야 합니다.
여야가 이 문제에 머리를 맞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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