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내일이면 꼭 일주일입니다. 서점에서 선생님의 책을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인용문을 보는데 그치지 말고 책을 직접 사서 읽는 사람이 더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은 사서 두고 읽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으니까요.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글을 썼지만, 서강대 손호철 교수가 19일자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인터넷판은 18일자)이 가장 가슴에
와닿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손 교수 같은 동행이 있어 불행 중 다행입니다. 원문은 아래 주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181957405&code=990304
시대의 스승, 리영희와 신영복
스승이 없는 시대이다. 그나마 몇 되지 않는 우리 시대의 스승 중 한 분이 또 세상을 떠났다. 5년 전 우리는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드린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영복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났다. 최근의 고령화 추세를 고려하면, 이제 75세면 아직 ‘창창한’ 연세이건만 왜 이리 빨리 우리 곁을 떠나는가?
신 선생님을 보내며 우리 시대의 두 선생님을 생각하게 된다. 이를 통해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두 선생님은 부조리한 현실에 치열하게 맞서 투쟁하며 긴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또 주옥같은 글로 우리를 일깨운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실천적 지식인이자 사표들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상당히 다르고 두 개의 다른 지식인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리영희 선생님은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칼날 같은 선비였다. <우상과 이성>이라는 그의 책 제목이 보여주듯이, 그는 평생 날카로운 펜으로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신봉해온 우상들을 거침없이 파헤치고 그 허구성을 폭로했다.
그러기에 그의 글은 항상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하다. 그의 추모 글에서 밝힌 바 있듯이, 리영희 선생님은 제자뻘인 우리들을 만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생각은 거의 없으면서 삶의 수준만 높게 살려고 하지만 정반대로 ‘생각은 높게 하지만 삶은 소박하게 살라’(think high but
live simple)”고 가르치셨다.
특히 청빈한 삶을 통해 이 같은 철학을 철저하게 실천하셨다. 그런 만큼 그렇게 살지 않는 인간들을 경멸하고 비판했다. 한마디로, 리영희 선생님은 남보다 열 발자국 앞서 나가며 ‘선도투쟁’을 통해 우리에게 갈 길을 보여주신 선각자였다.
신영복 선생님은 다른 스타일이다. 선생님이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오기 전에는 어떤 스타일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출소 후의 신 선생님은 리영희 선생님 같은 스타일의 지식인이 아니었다. 잘 알려졌듯이, 신 선생님이 좋아한 것이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론이다. 최고의 선은 물같이 사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선두를 다투지 않으며,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무리하지 않지만, 항상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이 물처럼 부드럽고, 다투지 않고, 무리하지 않으면서, 그러기 때문에 정말 강한 분이 바로 신 선생님이다.
리영희 선생님의 글이 ‘우상에 대한 도전’으로 항상 첨예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면, 신영복 선생님의 글은 오랜 감옥에서의 사색에서 우러나온 인문학적 성찰에 기초한 깊은 울림으로 이념을 넘어서 보수층까지 파고들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리 선생님이 천동설에 대항해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같은 외로운 ‘선도투쟁’의 지식인상을 상징한다면, 신 선생님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과 같은, 낮은 아래 방향으로의 ‘하방연대’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더불어’이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는 ‘더불어 숲’이다. “연대는 위로 하는 것이 아니고 물처럼 낮은 곳과 하는 것”이라는 하방연대론으로 그는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연대해야 하고 노동운동은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약한 운동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각자가 ‘홀로 열 발자국’을 앞서 가 대중들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선도투쟁보다는 ‘여럿이 함께 다 같이 한 발자국’을 나아가자는 연대투쟁과 ‘하방연대’의 사상가였다. 개인적으로도 삶의 원칙에서 치열했고 남에게도 엄격했던 리 선생님과 달리 신 선생님은 항상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는 부드러움, 그 자체였다. 개인적으로 젊었을 때는 리영희 선생님을, 나이 들어서는 신영복 선생님을 배우려고 했지만 둘 다 흉내도 내지 못했다. 두 개의 지식인상은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비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며 둘 다 반드시 필요한 우리 시대의 사표들이다. 특히 현재처럼 어두운 ‘반동’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선도투쟁과 하방연대의 두 사표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리 선생님에 이어 신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두 자리는 모두 비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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