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신영복 선생 타계(2016년 1월 16일)

divicom 2016. 1. 16. 08:31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이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스물일곱에 들어간 감옥에서 20년 20일을 보내고 중년에 환속하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으로 잠자는 대중을 흔들어 깨우신 분... 다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꺼내 읽으며 저를 돌아봅니다. 선생이 감옥에 계시던 1968년부터 1988년까지,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요? 선생이 출소하신 후 이 세상을 조금 더 맑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신 지난 28년...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요? 부끄러움이 슬픔을 더 진하게 만듭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디 자유를 누리소서!


아래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편지 한 장과, 신영복 선생의 타계에 대한 뉴스1 권영미 기자의 기사를 옮겨둡니다. 아시다시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신 선생님이 감옥에서 밖에 있는 가족들에게 쓴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편지 중 이 편지를 고른 것은 한겨울에 쓰인 이 편지가 지금 우리에게 죽비 노릇을 해줄 것 같아서입니다. 뉴스1 기사를 옮겨두는 이유는 신영복 선생 타계 소식을 전하는 기사 중 제일 좋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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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에 드리는 엽서

부모님께


새해는 언제나 추운 겨울 아침에 문 엽니다. 신년의 새로움은 겨울의 냉기 때문에 

더욱 정한(精悍)해지는가 봅니다. 세모, 신년, 그리고 긴 겨울밤...., 겨울은 생각이 

비옥(肥沃)해지는 계절입니다. 한 해 동안의 징역살이가 무슨 화석으로

가슴에 응고하는지 생각해보는 때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형님, 형수님, 동생, 계수님, 누님... 그리고 별처럼 꼬마들이 생각납니다. 

우용이, 주용이, 화용이, 주은이, 부경이, 애경이, 재경이, 강리....


무오년(戊午年). 말을 그렸습니다. 2천 년 전 고구려의 말을 그렸습니다.

1977년 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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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기사


스물일곱의 꽃다운 청춘이 감옥에서 20년을 보낸 후 중년이 되어서 나왔다. 20년의 긴 세월이라 거쳐간 형무소도 안양, 대전, 전주등 전국 곳곳이었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좌절하고 세상을 탓할 법하지만 고 

신영복 교수에게는 금이 불로 정련되는 사색과 반성의 시간이었다.


15일 75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 신영복 교수는 진보적인 지식인을 넘어서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었다.    

육군 중위로,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던 그는1968년 8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후 '간첩'이 되었다. 대학의 독서회와 연합서클 세미나를 지도한 이력이 '반국가 단체 구성죄'에 해당한다며 
1심과 2심에서 청천벽력같은 사형이 선고됐다.  

우여곡절 끝에 무기형으로 확정된 그는 그로부터 20년 20일 동안 신영복이 아닌 가슴에 붙인 번호로 
불리는 수인(囚人)이었다. 하지만 생전에 신영복 교수는 그 20년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표현했다. 
감옥은 그에게 ‘사회학’과 ‘역사학’과 ‘인간학’을 가르친 교실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 대로 기나긴 
수형생활 동안 그는 더 성숙해지고 깊어져 주옥같은 글들을 남겼다.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감옥에서 휴지와 봉함엽서 등에 깨알같이 쓴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묶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에는 큰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이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진솔함이 가득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산에는 그동안 흠씬 물 머금은 수목들이 무섭게 성장할 태세로 여름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름을 다만 더위로서만 받아들이기 쉬운 저희들은 먼저 저 수목들의 청청한 태세를 배워야 
합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기체후 만강하시길 빌며 이만 각필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물머금은 수목처럼')

부모님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서 신영복은 창밖으로 보이는 여름 나무들에게 닥칠 더위나 여름볕을 고통이나 시련으로만 보지 않고 '성장할 기회'로 보는 성숙한 눈을 보여준다.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對岸)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담장과 울타리. 공장의 사유, 지구의 사유, 불행의 사유, 출세의 사유, 숟갈의 사유…….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다.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독방에 앉아서') 

다른 이들과 말한마디 나누기 힘든 작은 독방에서조차 그는 개인과 개인이 섬처럼 존재하게 된 사회에 대해 우려의 마음을 갖는다. 그리고는 공동체의 삶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당신의 장탄식이 들리는 듯 합니다. 무수한 상품의 더미와 그 상품들이 만들어내는 미학에 매몰된 채 우리는 다만 껍데기로 만나고 있을 뿐이라던 당신의 말이 생각납니다. 정작 두려운 것은 그러한 껍데기를 양산해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을 잊고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나무야 나무야' 중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

'나무야 나무야'(1996)에서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자신의 시신을 해부하도록 했던 고향의 얼음골을 찾아간 후의 소회를 이렇게 쓴다. 제자를 위해 자신을 바친 유의태처럼 청년들에게는 '자신을 딛고 오르라'고 말한다. 

지난해 5월 투병중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역사의 변화는 쉽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며 희망과 인내의 메시지를 전했다.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서,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 있게,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고통속에서 오랫동안 단련된 순금(純金)의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