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치킨과 삼겹살(2015년 6월 5일)

divicom 2015. 6. 5. 13:18

엊그제 교보문고에서 산 <A Day No Pigs Would die>를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외서코너의 '대폭 할인' 코너에서 만났습니다. 책의 뒤 표지에 붙은 가격표를 보니 2011년에는 10,560원에 판매되었으나 저는 2000원에 샀습니다. 그래도 횡재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보관을 잘못했는지 책 모서리가 전체적으로 낡고 앞 표지 오른쪽 위 모서리는 헤지기까지 했으니까요. 


Robert Newton Peck의 이 소설을 집어 든 이유는 책 속지에 그가 아버지에게 쓴 헌사 때문입니다. "To my 

father, Haven Peck... a quiet and gentle man whose work was killing pigs"라는 짧은 글... "내 아버지 헤이븐 펙에게 바친다 ... 돼지를 죽이는 일을 하던 조용하고 점잖은 분 ".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돼지를 죽이는 헤이븐 펙처럼, 우리 주변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며 식구를 먹여 살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은 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이 책은 소설 형식으로 쓰여 있지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지금 22쪽을 읽고 있는데, 주인공인 로버트가 이웃집 소를 위해 장한 일을 한 덕에 돼지 새끼 한 마리를 선물받고 좋아서 팔짝팔짝 뛰는 장면입니다. 


저는 돼지고기보다 돼지를 좋아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돼지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돼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천재 돼지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책을 번역하면서였습니다. 원제는 <A Pig Called Francis 

Bacon>인데, 프란시스 베이컨은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살았던 철학자의 이름이기도 하고, 20세기 유명한 화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 책을 번역하며 베이컨과 함께 울고 웃던 일이 생각납니다.


읽고 있는 책 덕에 돼지 생각을 자주 하는데 하필 오늘 아침 자유칼럼에서 김수종 선배의 글 '치킨과 삼겹살의 본 모습'을 보내 주었습니다. <천재 돼지...>를 번역한 후 한동안 돼지고기를 먹지 않다가 체력보강을 이유로 다시 먹기 시작했는데, 이 글을 읽으니 치킨도 삼겹살도 먹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과 글을 안 읽는 시대가 되었다지만, 아직 글로써 식량을 삼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읽는 사람들에게 글과 책은 아주 강력한 자명종 같은 친구입니다. 김수종 선배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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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과 삼겹살의 본모습

2015.06.05


5월 중순 1박2일로 단체 남도 여행을 갔습니다. 저녁 9시가 넘어 산길을 달리다가 일행 중 누군가 치킨이 먹고 싶다고 호소했습니다. 치킨, 이 캄캄한 산골에서 그걸 어떻게 찾을까.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더니 어둠 속 길가에 ‘치킨’이라고 쓴 조명 간판이 보였습니다. 

일행이 먹을 치킨을 구우려면 한참 걸린다는 가게 주인의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짓자 주인은 배달해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초행길이어서 사실 숙소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인데 주인은 그곳으로 배달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거리인가 보다 하고 숙소를 찾아가는데 10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 후 가게 주인이 그 먼 밤길을 달려서 배달해준 덕에 일행은 즐겁게 치킨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치킨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것은 짐작이 됐지만 이렇게 방방곡곡에서 치킨 배달이 성업 중인 것은 몰랐습니다. 이런 배달 서비스가 되니 연간 소비되는 닭이 수억 마리가 되고 양계 재벌이 탄생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닭’이라는 말 대신에 ‘치킨’이라는 말이 득세하면서 미국식 닭튀김이 골목마다 생겼고 택배 서비스에 힘입어 치킨 붐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국에서는 2012년 슈퍼볼 결승전 당일 소비되는 닭 날개가 무려 12억 5,000만개였다고 합니다.

심산유곡에서 치킨을 먹고 돌아온 이튿날 아침 신문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오늘 당신의 야식은 스마트 치킨입니다.”라는 제목과 함께 수만 마리의 닭이 돌아설 틈도 없이 촘촘히 서 있는 거대한 양계장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사는 닭을 얼마나 과학적으로 기르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양계장 중앙에 특수저울을 설치하면 닭의 무게를 0.1초마다 측정하게 되어 하루 90만 개의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닭의 무게를 g단위까지 정확하게 맞춰 출하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해 능력으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빅데이터라는 말에 일단 신뢰를 보낼 뿐이었습니다. 산속에서 먹었던 치킨이 저런 양계장에서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사진을 보고 얼핏 공장식 양계장의 부정적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과학과 효율성 및 정확성이라는 단어로 충만한 기사를 보면서 한국 축산업의 발전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도 집안에 뒹구는 주간지 표지 제목 “공장식 축산 잔혹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표지 사진은 돼지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쇠틀에 갇혀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주간지 기사의 내용은 고기를 얻기 위해 사육되는 돼지든 닭이든 동물 학대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공장식 밀집사육 방식으로 키워진다는 고발성 보도였습니다. 

산란계(알을 낳는 닭)를 기르는 배터리 케이지라는 기구는 가로세로 50센티미터의 철창으로 그 안에 닭 6마리를 기른다고 합니다. A-4 용지의 3분의 2 넓이에 닭 한 마리가 들어가는 꼴입니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기르다보니 골다공증, 기형 발, 지방간 출혈 닭들이 나타납니다. 산란율을 높이기 위해 털갈이를 억지로 하게 되는데, 물을 주지 않거나 불을 끄지 않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가합니다. 이렇게 기르면 닭들은 스트레스로 다른 닭을 쪼는데 그걸 방지하기 위해 부리를 강제로 제거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먹는 95%의 달걀은 이렇게 키워진 암탉이 나은 알들이라고 합니다. 

어미돼지를 가둬두는 스톨은 폭60센티미터 길이 200센티미터의 감금 틀입니다. 여기에 갇힌 돼지는 방향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새끼를 낳게 됩니다. 새끼를 낳으면 어미젖에 상처를 입히게 될까봐 새끼의 송곳니를 강제로 뽑아버립니다. 스트레스를 받은 돼지는 상대의 꼬리를 물어뜯게 되는데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 돼지의 꼬리를 자르는 게 보편화되었다고 합니다. 

‘스마트 양계장’과 ‘공장식 축산 잔혹사’라는 전혀 다른 관점의 기사를 읽고는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스마트 양계장의 닭은 행복하고 배터리케이지의 닭은 불행한 것일까요. 

우리의 기억에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닭이 마당에서 벌레를 잡아먹었고, 소가 논두렁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었고, 돼지 떼가 우리에서 사료를 다투며 먹었습니다. 그들의 최후 운명은 오늘날 공장형 농장에서 길러진 동물들과 다름이 없었겠지만 그들은 가축의 일원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마당에서 모이를 먹던 닭 한 마리를 잡아먹으면서도 경건한 식탁의 분위기를 느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마당에서 기른 닭을 먹는 게 아니라 공장에서 나오는 치킨을 먹고 있습니다. 닭과 돼지와 소를 자연으로 돌아가게 만들 수가 있을까요? 육식에 중독된 인간이 자연에서 사육되는 동물만을 잡아먹을 정도로 절제력을 발휘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장형 농장은 이제 대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연은 자신을 고문하는 이런 공장형 농법에 무한정 관대할까요. 

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