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대통령의 말(2014년 3월 12일)

divicom 2014. 3. 12. 10:02

박근혜 대통령은 참 말을 잘하는 정치인입니다. 전임자인 이명박 씨와 비견될 수 있을 만큼. 작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토론을 벌일 때도 박근혜 후보가 말을 잘해서 대통령이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소위 가방끈이 긴 사람들 중에는 박 대통령의 말에는 구체적인 알맹이가 없다,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잘 모르는 일까지 있다며 그이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이의 말을 좋아했습니다. 무엇보다 지적인 단어와 논리를 드러내는 변호사 출신 문 후보의 말은 어렵게 들리고, 단순한 표어 같은 박 후보의 말은 쉬워서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선거는 누구나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보통선거'이니 박 후보가 당선된 건 당연한 일입니다. 


1월 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했을 때는 조금 불안했습니다. '대박'은 사전에 나와 있는 말이긴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국가 원수가 사용할 만큼 품위 있는 단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젊은이들끼리 은어처럼 쓰던 '대박'이 대통령 덕에 '격상'이 되어 이젠 머리가 하얀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말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며 갖가지 분석을 내놓습니다. 2월 5일 국무조정실 업무보고 때는 "진돗개는 한 번 물면 안 놓는다. 우리는 진돗개 정신으로 해야 한다." "퉁퉁 불어터지고 텁텁해진 맛없는 국수를 누가 먹겠느냐"고 하고, 10일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규제는 우리의 원수’ ‘쳐부술 원수’라고 했으며, 25일에는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천추의 한을 남기면 안 된다”고 했다니 당선 초기에 즐겨 쓰던 비유적 표현 -- ‘손톱 밑 가시’나 ‘신발 속 돌멩이’--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박 대통령의 강한 표현은 지난 2월 25일 취임 1주년에 맞춰 발표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신속히 실천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하는 중앙일보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보통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와 우리집은 만날 이 상태일까 생각하며 불만스러워 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들과 비슷한 표현을 쓰는 대통령은 '우리편'처럼 보일 테니까요.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60퍼센트에 육박하는 건 그런 민심을 반영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오직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한 번 강해지거나 천해진 말이 부드러워지거나 품위 있는 표현으로 회복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말은 정신을 반영합니다. 20세기 초반은 말할 것도 없고 한 이십년 전에 비해서도 요즘 우리말 표현은 불필요하게 드라마틱하고 천박합니다. 거칠고 격조 없는 우리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상황이 이런데 어떤 이유로든 대통령까지 나서서 우리말 표현을 더 강하고 무섭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하향평준화'를 목표하는 듯 아래로 아래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말을 지키는 데 앞장 서야 할 국립국어원에서 대통령의 어법에 대해 간곡한 한마디를 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