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태연 사장님 별세(2013년 12월 16일)

divicom 2013. 12. 17. 00:08

정태연 사장님, 


제가 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 견습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에 들어섰을 때 편집국장 석에 앉아 계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짙은 눈썹, 큼직한 눈, 잘 웃으시면서도 수줍어하시는 듯한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사회부에 7년 근무하던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정치부로 발령났을 때 소문이 무성했지요. 저는 정치가 싫고 정치부가 싫었지만 사람들은 제가 정치부로 가고 싶어 했을 거라고들 얘기했지요. 먼 훗날, 제가 12년 동안 근무한 코리아타임스를 떠나고도 꽤 긴 시간이 흘러 사장님과 옛 사우 몇이 만난 자리에서 사장님이 말씀하셨지요. 저를 큰 기자로 키우고 싶어 정치부로 보냈었다고. 


사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정치부에 정을 두지 않았던 게 참으로 송구했지만, 본래 정치적이지 못한 사람이라 큰 후회는 없었습니다. 편집국장을 지내신 후 코리아타임스 사장을 두 차례나 역임하셨으나 저는 한 번도 사장님이 선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건 사장님이 너무나 대선배이셨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부고를 보고서야 사장님이 한국일보 견습기자 3기 출신이신 걸 알았습니다. 제가 33기이니 꼭 30년 선배이셨군요. 


향년 80세에 떠나시니 좋은 나이에 가셨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도 애석합니다. 지난 가을부터 부쩍 사장님 생각이 나서 일산으로 한 번 찾아뵈어야지 생각하며 차일피일 하고 있었거든요. 언제나 맑고 기품 있으시던 사장님, 주신 사랑 갚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 12월 한가운데에서 사장님께 이별을 고하려니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사장님, 제가 존경했던 유일한 사장님, 부디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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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정태연 전 코리아타임스 사장님의 부음 기사와 오늘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전 코리아타임스 홍선희 기자(견습32기)가 작성, 낭독한 조사를 옮겨둡니다.


정태연 전 코리아타임스 사장이 지난 15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한국일보 견습기자(3기ㆍ1955년) 출신으로는 처음 코리아타임스 사장을 두 차례나 역임한 정 전 한국일보 고문은 한국일보 기사심사부장과 외신부장, 주월특파원, 편집부국장 겸 주일특파원, 편집국장대리,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부사장, 한국일보 고문 등을 지내며 60여 년간 언론에 몸 담았다.'파사현정(破邪顯正: 그릇된 생각을 깨뜨리고 올바르게 바로잡자)'이 좌우명인 고인은 퇴직 후 대학 강단에서 신문편집론 등을 가르치고 <인형의 계곡> 등 외국 소설들을 번역,'한국문학상'과 '예총(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예술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진용 ㈜케이씨티 대표와 딸 정미용 전 수원대 강사가 있다. 빈소는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
식장이다. 발인은 17일 오전 8시10분, 장지는 경기 파주시 크리스찬메모리얼파크이다. (02)2227-7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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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나흘전이군요. 1212일 목요일 저녁 코리아타임즈 전직 사우회 송년회에 참석했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일주일전에 입원하셨는데 위급한 상황이라 했습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게을렀던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매달려 있던 동네잡지를 만드는 일이 마무리되면 그 책을 들고 고양시 자택으로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없이 가버리시다니. . .


부지런하고 깐깐하며 악바리 근성이지만 속으로는 맑고 정이 깊은 분이었고 오랜 기간 유일한 여기자였던 저를 아껴주셨습니다. 성년이 되어서는 제 아버지와 지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한 공간에 있었던 것입니다.


고문님은 58년동안 한국일보사와 성쇠를 함께 하며 중학동 14번지를 지키셨습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장기영 사주의 오른팔로 특별 취재 혹은 사주를 보좌하기 위하여 국내외를 누볐고 공항을 사회부 출입처로 발굴했습니다. 사회부 차장, 외신부장, 편집국부국장을 거쳐 4년간 주일특파원으로 근무했습니다.


1959년 방콕으로 파견, 민항기 비행관할 구역설정을 위한 ICAO 취재를 시작으로 1백회 이상 해외취재를 다닌 덕분에 동료 기자들의 시샘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1960년 라오스 내전, 61년 미국과 중남미 14개국 및 유럽 26개국 순레, 62년 올림픽 예선 원정 축구단, 63-65년 동남아 순례 취재 등 굵직한 취재를 다녔습니다.


1960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와이로 망명했을때 고문님은 유학생을 가장하여 단독 취재에 성공해서 사진과 기사를 항공편으로 보냈고 장기영 사주는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IOC총회에 장기영 위원 보좌관으로 동행했고 이후 장강재회장 재임시에도 한국일보 및 자매지들을 통해 올림픽을 홍보하는데 애쓰셨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기간중에는 코리아 타임즈가 공식 신문 제직을 맡았으며 그런 노력 덕분인지 장강재회장이 사마란치 위원장으로부터 IOC 위원을 제의받는 쾌거를 만들어냈습니다.


지난 1125일 발행된 한국일보 전직사우회신문인 한우회보와의 인터뷰에서 정고문은 자신의 인생 모토가 파사현정(波邪縣正, 나쁜 것 잘못된 것을 피하고 올바른 것을 세운다)이라면서 창간 60주년을 맞는 한국일보를 재창간하는 정신으로 하루속히 난국을 해결해주기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정고문님은 오랜 기간 코리아 타임즈의 랜드마크이며 아이콘이셨습니다. 1974년 편집국장으로 부임, 이사, 상무, 사장, 고문으로서 영자일간지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지방판을 신설하였고 대사관이나 재한 외국인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일에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초짜기자시절 몇 년간 제 업무는 저녁에 열리는 대사관 리셉션을 취재하여 시내판 신문에 올리는 것이라 이태원 꼭대기에서 인적없는 밤길에 잡히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원망한 것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담당자가 확실하지 않은 기사꺼리나 외국인과의 즉석 인터뷰를 수시로 지시하고 편지쓰기 혹은 창립기념일 봉투 타이핑 등 시키셔서 왜 하필 나냐며 혼자 툴툴거리곤 했습니다. 저를 가깝게 생각하신 것이겠지요.


부음을 접하자 코리아 타임즈 사우들이 여기 저기에서 전화를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사우들의 청춘, 장년 시절 삶에 있어서 정태연이라는 분이 막중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정태연님으로 인해 맛깔스러웠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빈 자리는 오래 갈 것입니다그곳에서는 지팡이 던져버리고 경쾌하게 걸으십시오.


정태연 선배님, 당신을 많이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