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와 여운형 (2009년 7월 24일)

7월 21일 오전,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 7호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의 유택에 스페인에서 별세한 부인 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로리타 안) 여사의 유해가 합장되었습니다. 간간이 부는 바람이 하얀 차일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참석자들의 땀을 씻어주었습니다. 여사가 돌아가신 게 2월 16일이니 5개월이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돌아가셨을 때 바로 모셔왔으면 ‘앉은 자리도 옮기지 않는다’는 음력 6월에 합장을 거행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생각하니 스페인에서 온 유족들에게 미안했습니다.

행사 준비는 외교통상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했다고 합니다. 외통부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7월 16일자 보도자료엔 “여사는 1946년 스페인 마요르카섬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부임한 안익태 선생과 결혼, 1965년 선생이 작고한 이후에도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2005년 애국가 저작권을 한국 정부에 무상 기증하는 등 생전 한국인으로서 각별한 애국심을 보였으며, 09.2.16(월) 향년 94세를 일기로 마요르카섬 자택에서 별세”하셨으며, 합장을 위해 고인의 셋째 딸인 레오노르와 손자 미구엘 부부 등 5명이 7월 19일부터 일 주일간 방한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문광부입니다. 합장 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홈페이지에 ‘저작권 기증으로 한국인에게 감동을 선사한 故 로리타 안 여사, 남편인 故 안익태 선생과 합장 거행’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가 올랐습니다. 저작권 주무부서라서 그렇게 썼겠지만 좀 어색합니다. 로리타 여사가 감동을 준 건 저작권 기증 때문만이 아니니까요.

지난 2월 20일자 칼럼 ‘로리타의 사랑법’에도 썼지만, 스페인 백작의 딸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여사는 1930년대 유럽에서 활동하던 선생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팬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중 선생이 스페인에 피난 중일 때 만나 1946년 7월 5일 부부가 되었고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한 후 마요르카에 정착, 선생이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 사셨습니다. 두 분이 함께 산 19년 동안이나 선생이 떠난 후 44년 동안이나 여사는 내내 한국인으로 살았습니다. 2006년 12월 안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를 위해 한국에 왔던 여사는 “남편이 그랬듯이 우리도 늘 한국을 그리워한다”는 말로 많은 한국인을 감동시켰습니다.

문광부 보도자료에 장관 이름이 두 번이나 나오는 것도 실소를 자아냅니다. “※합장에 따른 유족(5명)의 참석 비용을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에서 지원”이라는 항목이 있는가 하면, “故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애국가의 저작재산권은 안익태 선생이 1965년 9월 별세한 후 로리타 안 여사가 상속받아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통해 신탁관리하여 오다가 ‘애국가는 한국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아무런 조건 없이 한국 국민에게 드리고자 한다’며 2005년 3월16일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에 기증한 바 있다.”고도 쓰여 있습니다. 2005년 3월엔 유인촌 씨가 아닌 정동채 씨가 문화부의 장관이었고 부처의 명칭도 ‘문화관광부’였는데 말입니다.

로리타 여사와 안익태 선생의 합장을 지켜보자니 해방 전후 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또 한 분이 떠오릅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입니다. 로리타 여사와 안선생의 합장이 이루어지기 이틀 전인 여선생의 62주기, 서울 우이동 선생의 묘소에서 추모모임이 열렸습니다. 일요일 오전인데도 2백여 명의 추모객들이 참석했습니다. 다음날엔 추모 학술심포지엄이 정동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대회의실에서 열렸습니다. 대회의실이라고는 하나 좌석이 부족해 서성이다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최를 한 ‘몽양(夢陽)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측은 내년엔 좀 더 넓은 장소를 물색해야겠다고 했습니다.

해방 전후 한국은 뛰어난 지도자를 여럿 잃었지만 제게는 여선생의 상실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기품 있는 외모도 외모려니와 평생 조국의 통일과 독립, 좌파와 우파의 합작을 위해 헌신하시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게 마음 아픕니다. 1886년 4월에 출생하신 선생은 1947년 7월 만 62세도 안 되어 서거하셨습니다. 선생이 1919년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도쿄에 갔을 때 제국호텔에 모인 5백 여 명의 일본 지식인들 앞에서 행한 연설문을 보면 선생의 기개가 더욱 그립습니다.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이제 세계는 약소민족해방·부인해방·노동자해방 등 세계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싸우지 아니하고는 인류가 누릴 자유와 평화를 못 얻을 것인가? 일본 인사들은 깊이 생각하라.”

선생은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15일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을 만나 치안권을 위임받고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에 취임했으며, 그때부터 좌우합작을 모색했습니다.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하면서도 좌우합작을 포기하지 않았고, 해방 후 다섯 차례나 북한을 방문, 자신보다 26세나 어린 김일성을 만나 통일을 위해 애썼습니다. 선생은 북한 방문을 만류하는 주변사람들에게 “나라의 통일 독립을 위해 선후배나 체면을 가릴 때인가. 오직 최선을 다해볼 따름이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좌우대립 속에서 합작을 이루려 노력하느라 평생 테러에 시달렸던 선생은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던 대로,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청년 한지근의 총에 피살되었습니다. 8월 3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인민장’으로 치러진 선생의 장례에는 60만 명이 넘는 시민이 함께 했다고 합니다.

안익태 선생과 로리타 안 여사가 합장된 국립현충원엔 167,914명의 묘지와 위패가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직에 있었던 사람 또는 국장이나 국민장으로 장의된 사람, 순국선열, 애국지사, 군인, 공무원, 외국인을 포함하는 국가 사회 공헌자들이 현충원에 안장된다고 합니다.

저로선 여운형 선생의 유택이 왜 현충원에 있지 않고 우이동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선생은 국민장의 전신이라 할 ‘인민장’의 주인공이었고 2008년 3·1절엔 뒤늦게나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으셨으니 말입니다. 서거 당시 남북통일 후 이장하기로 하고 철제관에 모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선생을 현충원에 모시지 않은 이유가 그런 것과 관계가 있을까요? 아니면 엊그제 김을동 국회의원이 지적한 대로 현 정부가 국가인권위원장 내정자 현병철 씨를 비롯한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후손’에게 유독 친절하기 때문일까요?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생애보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나라는 아직도 좌우대립에 갇혀 있습니다. 실패한 중도였던 선생에 대한 추모의 열기가 점차 강해지는 데서 그나마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여러모로 고통스러운 여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