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내 이름, 남의 이름 (2009년 6월 26일)

divicom 2009. 12. 29. 19:00

제가 처음으로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건 2003년입니다. 그해 3월 5일자 코리아타임스에 실린 첫 칼럼의 제목은 ‘Who Am I(나는 누구인가)?’였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글이니 저를 소개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엔 뭔가를 알고 싶으면 사전을 들췄지만 언제부턴가는 인터넷을 클릭합니다. ‘야후’인지 ‘다음’인지 포털에 들어가 ‘김흥숙’을 치니 56개의 사이트가 나타났습니다.

‘김흥숙’중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습니다. 유아원 원장, 전도사, 사회복지사, 번역가, 막 아기를 낳은 어머니, 라디오 작가, 조기축구회 회장 등 실로 다양한 ‘김흥숙’이 있었습니다. 짐작은 했었지만 내 이름이 나만의 이름이 아님을 눈으로 확인하자 재미있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가끔 포털에서 제 이름을 검색해봅니다. 이젠 이름이 실린 사이트의 수를 세진 않고 남의 눈으로 저와 제 글을 봅니다.

이달 초엔 우연히 ‘지반공학산악회’ 다음카페에서 오래전 제가 쓴 시를 보았습니다. ‘안교수’라는 아이디를 쓰는 분이 올려놓았는데 두어 군데 틀리게 옮기긴 했지만 크게 마음 쓰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며 제목이나 문장을 원문과 다르게 옮기는 일은 비일비재하니까요. 그런데 그 아래 “김흥숙 씨는 뉴라이트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이라는 문장이 보였습니다.

저는 어디에 ‘소속’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소위 프리랜서로 살고 있습니다. 못 보았으면 모르되 보았으니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카페엔 연락처는 물론 ‘지반공학산악회’가 어느 대학의 지반공학산악회인지조차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컴퓨터도 잘 다루는 편은 아니어서 30분은 좋이 지나서야 조선대학교 지반공학산악회의 안종필 교수께 시정 요청 이메일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같은 카페에는 “김흥숙 시인의 소개에 대한 시정”이라는 제목 아래 “전번에 김흥숙 시인의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를 올리면서 김 시인을 뉴라이트 소속이라고 소개해 드렸으나 사실이 아니라는 김 시인의 정정 메일을 받고 바로잡고자 하오니 이해하기 바랍니다.”라는 글이 올라 있었습니다. 문장에서 ‘이 사람은 뉴라이트 소속이지만 자신이 아니라고 하니 이해하자’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건 표현의 문제일 뿐 일부러 그렇게 썼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안 교수께서 따로 보낸 이메일에서 진심으로 미안해하시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요.

그 사건(?)이 있고 2주일 후쯤인 지난 17일, 생각지 않은 곳에서 제 이름을 보았습니다. 선진화교수연합과 선진화시민행동이라는 단체들이 9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지식인 시국선언’을 발표했는데 그 서명자 명단에 제 이름이 올라 있는 겁니다. 서명자들은 교수, 목사, 의사, 변호사, 교장, 시민단체로 분류되어 있었고 제 이름은 ‘시민단체’난에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시민단체 두 곳의 회원이지만 ‘선진화’를 표방하는 단체는 아닙니다.

바야흐로 시국선언의 나날이지만 어떤 선언에도 참여하지 않은 제가 그 명단에서 제 이름을 보니 퍽 당혹스러웠습니다. 더욱 황당한 건 그 두 단체의 주장이 제 생각과 전혀 달랐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그 명단에서 제 이름을 지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김흥숙’은 제 이름만이 아니며 수많은 남자와 여자의 이름이기도 하니, 그 명단에 있는 이름이 제 이름과 같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존경받는 재일(在日) 지식인 서경식 선생의 저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으나 훗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쁘리모 레비는 그 악명 높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지옥’에 왔음을 알아차립니다. 그 지옥에선 모두 이름을 빼앗기고 번호를 부여받습니다. 선생은 “이름의 박탈은 인간에게서 인격을 빼앗고 인간을 ‘사물’로 취급하기 위해 필수적인 절차”이며 “지배자는 항상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서술합니다.

하나의 이름이 한 사람에게만 주어져서 그 이름이 오롯이 그 사람의 인격만을 나타내게 되면 좋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날 세상에는 한정된 문자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이들이 많고, 인터넷 세상은 사람보다 이름에 주목합니다. 포털사이트에 올라 있는 제 얼굴 중엔 저와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의 얼굴이 있고, 다른 ‘김흥숙’이 그린 그림이 제 작품으로 소개되어 있기도 합니다.

시간이 더 흘러 인터넷 사용자의 수가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면 사람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대신 인터넷의 지배를 받게 되고, 수많은 동명이인들의 삶과 인격이 마구 섞이어 극심한 혼란이 빚어지다가, 마침내 인간이 ‘사물’로 취급받는 시대가 올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바로 그 혼란으로 인해 사람들이 타인의 삶에 좀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다행이며 불행인 건 내 이름이 누구의 이름이 되어도 나는 나라는 겁니다. 장미를 장미라 부르지 않아도 그 아름다움과 향기가 그의 것이듯, 인터넷이 나를 무어라 부르든, 남들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든, 내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남들의 칭송이나 비난에 상관없이 나만은 내가 누구인지, 내 최선의 모습과 최악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압니다. 죽음에 이르러 내 마음을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할 나는 인터넷에 떠있는 내가 아니고 내가 아는 나일 겁니다. 그러니 인터넷에서 뭐라고 하거나 마음 쓰지 말고 나를 개선하는 일에 매진해야겠습니다. 동명이인들에게 가능한 한 누를 끼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