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책상물림 6

시인의 가난 (2023년 5월 4일)

'가난한 시인'이란 말은 있어도 '부유한 시인'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 중에도 부자가 있고 시집이 잘 팔려 부자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소수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대개 현실적으로 무능하여 궁핍한 생활을 한다는 게 사회적 통념입니다. 시인의 가난은 아마도 '시'에 내재하는 즉흥성이나 자발성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겁니다. '시'는 현실적 계산이 없는 마음, 혹은 그런 계산을 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어느 순간 일어나는 '발로'의 기록이거나 그런 마음에 예고 없이 찾아 오는 천둥 번개나 봄비 같은 것이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시 쓰는 법도 배우고 가르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시 작법을 배워 쓰는 시보다는 '시는 시인이 쓰는 글이며, 시..

동행 2023.05.04

코끼리 발 앞의 개미 (2023년 4월 7일)

요즘 베란다에 나가면 소리 없는 소리, 생명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꽃과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내는 모습이 신나게 일하는 일꾼들 같습니다. 꽃마다 잎마다 눈을 주며 '어찌 그리 아름다우신가' 경탄합니다. 봄은 참 소란하고 아름다운 침묵의 계절입니다. 참으로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모양은 모양이 없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송혁기의 책상물림 없음과 있음의 역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자신의 집에 ‘오무헌(五無軒)’이라 써 붙인 이가 있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다섯 가지 중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다섯 가지를 하늘에서 부여받았으므로 이를 실마리로 삼아 확충해 감으로써 본래의 바름을 회..

오늘의 문장 2023.04.07

어찌할까, 어찌할까 (2023년 2월 8일)

어떤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아름답고 어떤 사람은 침묵할 땐 그저 그런데 말을 하면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말을 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을 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 중엔 말만 잘하는 사람이 있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만 잘하는 사람은 말과 달리 행동하고 사는 사람이지만 말도 잘하는 사람은 행동거지와 삶이 진실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말도 잘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만 잘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송혁기의 책상물림 어찌할까, 어찌할까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공자는 말 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속은 강하고 굳세면서 겉은 질박하고 어눌한 ‘강의목눌(剛毅木訥)’이 이상적인 인격에 가깝다고 했다..

동행 2023.02.08

익숙함이라는 적 (2021년 6월 16일)

거리가 좀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지켜지는 예의가 낯익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 흔합니다. 처음 해보는 일을 할 때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하지만 익숙한 일을 할 때는 건성으로 하다가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 관계, 환경... 익숙해지면 편해지고 편해지면 조심하지 않아 사고가 나고 뒷걸음질 치기 쉽습니다. 2021년 여름은 제가 살아온 여러 해 중에 가장 편하고 편리한 해,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무례하고 시끄럽고 건성으로 가득한 해. 그래서 아래 글이 눈에 들어왔나 봅니다. 송혁기의 책상물림 익숙함을 경계하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조선 후기 문인 홍길주가 오랜 지인인 상득용에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축하하는 이유가 이상하다. 상득용이 말에서 떨어진 일을 축하..

오늘의 문장 2021.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