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살아남은 자의 슬픔 (2008년 9월 19일)

divicom 2009. 12. 8. 09:52

이번 추석은 꼭 빚쟁이들에 둘러싸여 치르는 잔치 같았습니다.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고 메릴 린치가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팔려 금융대란이 전 세계를 휩쓸었지만, 주식시장이 연휴에 들어간 덕에 송편을 빚고 빈대떡도 부쳤습니다. 화요일 아침 시장이 열리자마자 코스피지수와 코스닥지수가 곤두박질치더니 코스피는 작년 3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코스닥은 작년 8월 이후 최대 하락률을 보였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투자해둔 돈이 줄어 걱정을 하지만, 돈 없는 저는 금융시장의 요동이 절망을 부채질해 자살하는 사람이 늘지나 않을까 마음이 쓰입니다. 작년 한 해 이 나라에선 하루 평균 3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2006년에 이어 또 다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했습니다. 게다가 탤런트 안 재환씨의 죽음이 준 충격을 안고 연휴에 들어간 탓인지, 올 추석 전후엔 제례를 통해 저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대신 아예 저 세상 시민이 되어버린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습니다.

추석날 새벽 부산 사상구의 한 아파트 29층에서 뛰어내려 숨진 25세 젊은이는 2년가량 사귀다 헤어진 여자 친구를 잊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하고, 비슷한 시각 같은 부산의 남구에 있는 아파트 20층에서 뛰어내린 32세의 여성은 결혼비용 문제로 애인과 말다툼을 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투신했다고 합니다.

추석 전날 새벽 전남 화순에서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뇌졸중을 앓는 부인에게 둔기를 휘두른 후 아파트 13층에서 뛰어내린 82세 할아버지, 같은 날 오후 전북 정읍에 있는 모텔에서 목매 숨진 32세의 투숙객, 그 한 시간 전쯤 강원도 고성에서 연탄을 피워 자살한 36세의 남자, 오후 5시께 울산 북구의 아파트 공사현장 부근에서 승용차 안에 연탄불을 피운 채 숨진 32세의 여성, 하루 전인 13일 부산 동래구의 한 호텔 객실에서 연탄 4장을 피워 놓고 죽은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

자살은 전 인류를 공격하는 전염병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매년 100만 명 이상, 즉 30초에 한 명씩이 자진해서 목숨을 버리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50년간 전 세계의 자살률은 60퍼센트나 늘었으며 개발도상국과 노년층에서 특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로 인한 조사망률 (인구 10만 명 당 사망자수)은 작년에 24.8명으로 10년 전보다 90퍼센트나 증가했습니다. 10대 4.6명, 20대 21.0명, 30대 22.4명, 40대 26.3명, 50대 31.1명, 60대 47.7명, 70대 78.5명, 80세 이상 117.3명으로 연령이 많아질수록 자살률도 높았습니다.

일본 작가 우에다 가요코(上田加代子)는 “죽음의 역사”에 자살 동기는 989가지, 자살 방법은 83가지라고 썼지만, 저는 자살 동기는 자살자 수만큼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유와 방법이 다르다 해도 죽음을 결심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 순간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외로움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로움에 사로잡혔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넥타이로 목을 매던 일, 비 오는 밤 한강으로 들어서던 일, 창문을 열고 지상과의 거리를 가늠하던 일... 죽고 싶은 열망 속엔 늘 그 열망보다 큰 키의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지상의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절망감. 그런데 이렇게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평균 수명을 넘겨 사는 사람은 누구나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짧은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속 부끄러움에 공감할 것입니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는 시구의 ‘강한’이 ‘비겁한’ ‘비열한’ ‘꾀 많은’ 등, 무수한 부끄러운 형용사로 대체될 수 있을 테니까요.

운이 좋아서이든 강해서이든, 결국 죽을 거라는 명제에 기대어서이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먼저 떠난 이들의 유산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일들 말입니다. 아름다운 시를 쓰는 일이든, 사업을 성공시키는 일이든, 죽을 때까지 살아내는 일이든, 우린 그것을 해내야 합니다. 두려워할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실패는 우리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