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사소한 결심 (2008년 10월 17일)

divicom 2009. 12. 9. 11:07

높으신 분들은 너른 사무실에서 큼직큼직한 결정을 하지만 저는 부엌의 작은 의자에 앉아 사소한 결심 몇 가지를 합니다. 웃음거리가 될 각오를 하고 말씀드리자면, 첫째, 고추, 말린 나물, 잡곡 등 농산물은 되도록 충북 괴산 것으로 산다, 둘째, 두부, 콩나물 등 생식품은 특정회사 것을 사먹는다, 셋째, 공무원, 국회의원, 교육감, 경찰 등 공직자들을 믿지 않는다, 넷째, 어린 자녀를 가진 친구들에게 강남을 떠나라고 설득한다, 입니다.

괴산 농산물을 사기로 한 건 괴산의 모 중학교 학부모들이 보여준 ‘결기’ 때문입니다. 작년 모 중학교에 재직할 때 여교사를 성희롱했다가 정직 1개월의 징계를 받았던 사람이 광복절 사면을 받고 이 학교 교장으로 부임해오자 학부모들이 여러 차례 교체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도교육청이 조처를 취하지 않자 학부모들은 학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마침내 지난 수요일에 해당 교장이 직위해제되고 새 교장이 부임했다고 합니다.

자기나라 경찰이 자기나라 바다에서 남의 나라 어부 손에 살해를 당해도 큰 소리 내지 않는 정부,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손해를 본다고 지레 짐작하며 침묵하는 사람들.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한숨을 쉬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괴산 분들이 키워내는 농산물은, 이익을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들이 키우는 작물과는 다를 테니 이 분들이 키운 걸 먹고 싶습니다.

둘째, 특정회사가 생산한 식품을 사먹기로 한 건 일요일 저녁에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슈퍼에서 산 생우동을 끓이려고 봉지를 여니 그 중 한 봉지 속 국수의 삼분의 일이 반죽상태였습니다. 상한 건 아니지만 먹을 수 없는 상태라, 네 사람이 3인분으로 나누어 먹고 속이 상해 그 회사의 홈페이지에 사정 얘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겨우 한두 시간 후에 그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때 바로 결심했습니다. 이제부터 이 회사 제품만 사먹어야지, 하고. 그러나 이 회사가 어디인지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괜히 별 것 아닌 일로 이 회사를 괴롭히는 소비자를 양산하면 안 되니까요.

이 회사가 소비자의 불평에 대응하는 태도를 보니 며칠 전 일이 떠오릅니다. 2000년 5월에 가족이 타던 차를 폐차한 적이 있는데, 그 차가 저지른 3건의 위반사건에 대한 과태료 12만원을 10월 15일까지 내라는 독촉장이 날아든 겁니다. 3건의 위반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내역은 없었지만 있었다 해도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8년도 더 지난 일이니 말입니다. 종로구청의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하여 폐차할 당시 내라는 과태료를 다 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전문용어를 써가며 설명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시에서 겪는 모든 문제는 ‘120 다산콜센터’에서 해결해준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120에 전화를 하니 여성 상담원이 친절하게 응대해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자며 제 핸드폰 번호를 물었습니다.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인가 ‘서울시청’이라며 웬 남자가 핸드폰이 아닌 집 전화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말의 내용은 120 상담원이 했던 걸 되풀이하는 수준인데 “나는”과 “내가”를 연발하는 어투는 상담원과 다르게 거슬렸습니다. 이 일을 겪으며 세 번째 결심이 싹텄고, 결심을 다지게 하는 사건이 연이어 보도되었습니다.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은 유명한 학원들과 급식업체들로부터 받거나 빌린 7억여 원으로 7월 30일 선거를 치러 당선되었다고 하고, 국회의원과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을 포함, 농사를 짓지 않는 4만 6천여 명의 공직자와 가족들이 농민에게 지급되는 쌀 소득 보전 직불금을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으며, 관악경찰서의 경찰관 4명은 절도혐의로 잡혀온 장애인을 조사하다 폭행하고 그 사실이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 거액의 합의금을 건넸다고 합니다.

네 번째 결심은 서울 강남의 초중고생들이 가장 많이 정신질환에 시달린다는 보도에 따른 것입니다. 국회 보건복지위 박은수 의원이 분석한 걸 보면, 정신질환으로 진료 받은 강남 학생의 비율은 100명당 3.85명으로, 강원도 양구의 0.91명에 비해 4.2배나 높습니다. 게다가 서울 서초구, 강남구, 중구, 송파구 등, 재정자립도 상위 4곳의 정신질환 학생 비율은 지난 2003년 100명당 1.71명에서 지난해 3.36명으로 96.5% 증가했다고 합니다.

어디에 살든 청소년들이 느끼는 고민과 고뇌는 비슷한데, 부잣집 아이들이 가난한 집 아이들보다 쉽게 진료를 받기 때문에 비율이 높게 나온 거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정신질환 진료를 받은 청소년이 제일 적은 양구에는 괴산의 학부모와 같은 어른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곳 학생들은 경쟁을 부추기지 않는 부모덕에 마음이 편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일에 분연히 맞서는 어른들을 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운다고 말입니다.

과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 앞에서 ‘넌 내 덕에 정신 치료를 피한 줄 알아’하고 득의만면하며 네 번째 결심을 합니다. 이런 태도를 갖고 있어 재정자립도 낮은 구에서 이렇게 사는 거라고 비웃어도 상관없습니다. 괴산 학부모님들 덕에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상기하게 되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