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신자들이 다시 중동 선교에 나섰다고 합니다. 모 선교단체 회원 10여 명은 이란의 테러 위험지역에서 체포되어 출국 조치되었고, 탈레반의 지배하에 있는 파키스탄 북서부에 방문허가증도 없이 들어갔던 선교단체의 대학생들은 현지 경찰에 붙잡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분당 샘물교회 신도 23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되어 2명이 살해당하고 42일 만에 석방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한숨 끝, 권 정생 선생의 글, <우리들의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이 그냥 맨 마룻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 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옷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
1937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하여 1946년에 귀국한 선생은 1955년부터 결핵을 앓기 시작하여 평생 병고에 시달리다 작년 5월 17일 돌아가셨고 글과 책만이 사리(舍利)로 남았습니다. <몽실언니> <강아지 똥> 등 선생이 남긴 수많은 베스트셀러 중에서도 <우리들의 하느님>이 더욱 빛나는 건, 선생의 소박하나 깊은 사랑이 빚어내는 슬픔과 분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60년대는 참 가난했다. 그러나 그때의 교회는 따뜻한 정이 있었다. 당시의 교회 회계장부를 들춰보면 누가 몇 백 원 빌려갔다가 언제 갚았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전도사님은 손수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때고, 무너진 교회담장을 쌓기도 하고 우물을 손수 팠다... 예배시간에 헌금봉투에 이름을 적어 바치는 그런 외식적인 것도 없었고 오히려 남에게 알려질까 봐 부끄러워했다.”
선생은 세례를 받은 지 30년에, 집사가 된 지도 그만큼 되었는데 만족한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다면서 “예배당 문간방에 살면서 새벽종을 울리던 때가 진짜 하느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고 회상합니다. 선생은 1967년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의 마을교회 문간방에서 지내며 교회 종지기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는 70년대에 들면서 갑자기 권위주의, 물질만능주의, 거기다 신비주의까지 밀려와서 인간상실의 역할을 단단히 했다. 조용히 가슴으로 하던 기도는 큰 소리로 미친 듯이 떠들어야 했고, 장로와 집사도 직분이 아니라 명예가 되고 계급이 되고 권력이 되었다... 부흥사들의 억양은 우리말의 발음까지 비뚤어지게 해놓았다. 특히 ‘믿습니다’는 ‘믿쑵니다’로 ‘예수님 이름 받들어’는 ‘예슐룸 발들어’로 ‘사랑’은 ‘샤랑’으로... 성령을 받거나 은사를 받으면 말투가 그렇게 되는 것인지, 참으로 불손하기 그지없다. 시장에서 가짜약을 파는 약장수도 그렇게까지는 안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만하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는다고 했잖은가? 예수님은, 기도는 골방에 숨어서 하고, 더욱이 금식할 때는 머리를 빗고 절대로 남에게 티를 내지 말라고 했다.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고 시장거리에서 떠들지 말라고 했다. 지금 교회는 어떤가? 선교를 한답시고 온 세계에 떠들고 다니며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온갖 공해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도 하나의 공해물로 인식된다면 빛과 소금은커녕 쓰레기만 배출해내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녹색평론> 발행인 김 종철 선생은 내방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편찮으신 선생을 괴롭히던 걸 상기하며, 그들은 선생에게서 성자(聖者)의 모습을 보려했을지 모르나 그는 “상투적인 성자의 이미지와는 매우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고 추억합니다. 그는 권력 있는 자들과 그들의 세계에 대하여 거의 본능적인 위화감을 느꼈으며 그런 감정을 별로 숨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대신 이 세상의 약자들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포함한 --에 대한 그의 본능적인 연민 혹은 사랑은 측량할 수 없이 깊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 자신의 철저한 밑바닥 체험과 평생에 걸친 병고(病苦)와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혹은 그의 기독교 신앙과도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권 정생은 이른바 교인다운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다... 그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믿은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자본주의 근대문명과 근원적으로 화합할 수 없는 ‘비근대인’으로서의 일관된 삶을 살아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행여 선생의 별세로 그 분의 목소리가 약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던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있습니다. 지난 달 국방부에서 ‘불온서적’으로 선정한 23종의 책 중에 <우리들의 하느님>이 들어 있고, 그 불온한 명단에 든 책들의 판매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겁니다. 선생의 목소리를 접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선생을 닮으려는 사람도 늘지 않을까, 기쁘게 소망하면서도 궁금합니다. 근데 왜 이 책이 ‘불온서적’이 되었을까요? 혹시 이런 구절 때문일까요?
“해를 기준으로 만든 달력은 양력이고, 달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은 음력이다. 어느 것을 사용해도 세월은 같이 흐른다... 그런데도 요새 사람들은 흡사 달력이 있기 때문에 날짜가 가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있고, 교회에 가서 울부짖는다고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기독교가 있든 없든, 교회가 있든 없든, 하느님은 헤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우주를 다스려왔다. 선교사가 하느님을 전파하면 하느님이 거기 따라다니며 머물고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하느님은 어디서나 온 세계 만물을 보살펴오셨다... 종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려는 의지이지, 종교가 요구하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꾸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바로 자연의 섭리가 된다. 하느님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 했다. 그러니 하느님은 곧 자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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