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2007년 5월 24일)

divicom 2009. 11. 17. 00:05

컴퓨터 앞에 앉아 며칠 무리를 했더니 목을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동네 정형외과에 갔더니 목 디스크라고 엉덩이에 주사를 놔주며 물리치료를 받으라고 합니다. 물리치료실엔 작은 방이 15개, 각 방마다 두 개의 침대가 있어 서른 명이 한꺼번에 치료를 받을 수 있는데도 한참 기다려야 합니다.

마침내 9호실에 자리를 잡고 엎드리자 목덜미로 붉은 빛이 쏟아집니다. 옆 침대에 엎드린 부인의 허리 위에도 적외선 노을이 한창입니다. 치료사들과 허물 없이 얘기를 나누는 걸 보니 오래 다닌 환자입니다. 늘 무거운 물건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허리가 아픈지는 한참 되었지만 나이 들어 그러려니 하여 병을 키웠다고 합니다.

입이 아픈 사람이 없는 병원이라 환자들끼리, 혹은 환자들과 치료사들이 도란도란 끝없는 대화를 이어갑니다. 저처럼 일시적인 환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 힘겹게 살다가 지병을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 가 누웠을 때는 “참 말들도 많구나, 병상에서조차 쉴 수가 없구나!” 한탄 겸 푸념을 했지만 사나흘 다니다 보니 편하게 살아온 제가 부끄럽습니다.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오고 한동안은 좀 막막했습니다. 전에 살던 동네에선 앞 뒤 창 밖이 온통 나무와 산이라 집을 나서면 십 분도 안 되어 나무 숲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민도 많지 않았고 늘 산을 보고 살아서인지 얼굴들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가을에 이사온 새 집, 창문 밖은 온통 하늘이지만 그 아래엔 가난한 작가의 노트를 채운 글씨들처럼 수많은 집들이 빼곡하고 나무들 대신 조그만 가게들이 숲을 이루고 서있습니다. 2차선 도로 옆 인도엔 가방, 옷, 신발 등 온갖 상품들, 자장면을 배달하기 위한 오토바이와 자전거, 수거해가라고 내놓은 온갖 박스들이 장애물 노릇을 합니다.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고 입을 열면 무례한 언어가 거침없이 흘러 나옵니다.

대학이 가까우니 분위기가 그럴 듯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살아 보니 그렇지가 않습니다. 서점이 있긴 해도 볼 만한 책이 드물고 식당도 분식집 아니면 삼겹살 집입니다. 보이는 것 모두 눈에 거슬리니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다간 온종일 시비나 벌여야 할 판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들었으면 이사를 하라고 했을 겁니다.

겨울이 되자 늘 왁자지껄하던 길이 문득 조용해졌습니다. 가게마다 텅텅 비어 그 앞을 지나가기가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2차선 도로에 함부로 서있던 자동차들, 인도의 장애물도 뜸해졌습니다. 방학이 되어 학생들이 사라진 거리는 겨울 해수욕장처럼 쓸쓸했습니다. 점차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학기 중에 많이 벌었다 해도 대학의 방학은 두 달이 넘는데… 식당도 화장품 가게도, 책 없는 서점도 복사집도 모두들 어떻게 먹고 사나. 저 가게 한 칸마다 딸린 식구가 있을 텐데…

제 형편도 넉넉지 않은 주제에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하는 전 우익 선생의 책을 자꾸 생각했습니다. 대지주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청년운동을 하다 6년간 옥고를 치르고 한평생 농부로 살다 돌아가신 분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혼자 잘 사는 걸 행복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아주 다른 인생을 사셨겠지요.

사는 곳이 사람을 바꾼다는 맹자 어머니의 생각이 맞기는 맞나 봅니다. 언제부턴가 제 아침 기도의 내용이 바뀌었으니까요. 전에 살던 곳에서는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었으면” 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저렇게 힘겹게 사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하는 자문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처럼 황사도 없고 안개도 없어 창 밖의 집들이 다 몸을 드러내는 날은 낮이건 밤이건 그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나쁜 동네의 영향으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고자 세 번씩 이사를 했다지만 이사를 하지 않고 “속세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가르쳤더라면 아들이 더 큰 인물로 자랐을 지 모르는 일입니다.

“돌아 누우세요.” 치료사가 시키는 대로 몸을 뒤집으며 보니 옆 침대의 부인은 벌써 뜨거운 찜질 팩 위에 두툼한 허리를 얹고 누워 있습니다. “아이고, 이눔의 허리, 언제나 나을랑가.” “오래 부려 먹었으니 한참 다니셔야 할걸요.” 부인과 치료사가 소리하는 사람과 북 치는 사람처럼 주고 받습니다. 아직은 이들의 동무가 되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요. “지옥이 텅 비지 않는 한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다는 지장보살의 사랑이 이 어리석은 중생에게도 미칠 터이니까요.

*이 연걸 주연의 영화 “태극권”에 나오는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