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선배를 선배라 부르라 (2010년 11월 19일)

divicom 2010. 11. 19. 10:31

장명수 한국일보 고문과 연극평론가 구희서 선생의 수상을 축하하는 점심 자리에 다녀왔습니다. 구 선생은삼성생명공익재단이 수여하는 제 15회 비추미여성대상을 수상했고, 장 고문은 한국언론학회가 창립 51주년을 기념해 '언론과 방송 발전에 공헌하신 분들'에게 수여한 상을 받으셨습니다.

 

구 선생과 장 고문, 두 분 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이어서 점심 자리에 온 대부분의 후배들도 한국일보와 한국일보의 자매 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 연극 저널리즘을 개척한 산 증인'인 구 선배의 수상도 기뻤지만, 장 선배의 수상이 더 관심을 끈 이유는 그분이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한국언론학회 상을 수상했기 때문입니다. 여덟 명이나 되는 수상자 중에 여성은 장 선배 한 분이었습니다. 

 

언론은 그 어느 분야보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정신을 요구하지만 언론계는 오랫동안 닫힌 사회였습니다. 남자 기자는 늘 '기자' 대접을 받았지만, 여자 기자가 '기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1960년대 초에 한국일보의 기자가 된 장 선배가 얼마나 많은 편견과 싸워야했을지 보지 않았어도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특유의 날카로운 필력으로 '장칼'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지면을 빛내다 한국일보 사장직에까지 올랐으니 장 선배가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게 당연하지요.

 

수상을 축하하는 자리가 언제나 화기애애한지는 알 수 없지만, 어제 점심은 참 유쾌하고 즐거웠습니다. 비추미여성대상의 상금 덕에 마이너스 통장의 빚을 탕감했다는 구 선배의 고백 덕에 웃음을 터뜨리면서 욕심 없이 사신 선배의 칠십 평생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기도 했습니다. 장 선배가 받은 상엔 상금이 없었지만 언론학자들로 구성된 학회가 '자본과 정치로부터 독립된 언론을 위해 노력'했음을 인정한 것이니 특별히 의미있다는 게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유쾌한 웃음 사이로 잠시 분개와 냉소가 흐른 건 장 선배를 '선배'라 부르지 않고 '여사'라 부르는 남자 후배 얘기가 나왔을 때였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신문사나 방송사의 부장이나 높은 사람이 기자를 부를 때 '000 기자'라고 하지만, 실제 언론사에서는 그냥 '000씨'라고 합니다. 기자들 사이의 호칭은 '선배'와 '000 씨' 밖에 없습니다. 후배는 선배를 '김 선배' '장 선배'하는 식으로 부르고 선배는 후배에게 '000씨'라고 합니다. 장명수 선배가 한국일보의 사장을 하실 때도 후배 기자들이 그분을 부를 때는 '장 선배'였습니다. 그런데 남자 후배가 장 선배에게 '장 선배'라고 하지 않고 '장 여사'라고 했다는 겁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불문율을 무시한 무례한 처사이지요. 

 

남자들 중에는 여성 동료를 동등한 '동료'보다 '여성'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구 선배와 장 선배로부터 저희에 이르는 세대에는 그런 남자들이 많습니다. 저도 기자 생활을 할 때 그런 남자 동료들로부터 '여자가 그렇게 열심히 해서 뭐하려고 그러냐?'는 식의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장 선배를 '여사'라고 부른 남자에게 옆에 있던 남자 동료가 '선배를 왜 여사라고 하느냐'고 지적하니, '난 여사라고 해야 친밀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문제는 여성들이 그런 남자와는 '친밀'해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직장에서 여자 상사나 동료를 부를 때 직함이나 호칭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존여비에 젖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애인이나 배우자를 대할 때도 남성우월주의적 태도를 보입니다. 

 

다행히도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남존여비는 이제 지나간 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자든 남자든 '선배'는 '선배'입니다. 선배가 여자라는 이유로 '선배'라고 부르지 않는 남자들, 그들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일 뿐입니다.

 

두 선배의 수상을 축하하는 자리가 파할 때, 맛있는 점심을 차려준 인사동 '우정'의 사장님이 두 수상자의 밥값은 받지 않겠다고 해 다시 한 번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우정'의 대표답게 동료 여성들에게 '우정'을 보여주신 거지요. 구 선배가 예전에 '맛동산'을 좋아하셨던 걸 기억해 '맛동산' 한 상자를 사온 선배 덕에 수상자들은 물론 '우정'의 직원들과 참석자들 모두 '맛동산'을 나눠들고 헤어졌습니다. 존경할 만한 '선배'들 덕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