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응급실' 카페에 갔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습니다.
창가 자리엔 두 여인이 담소 중이고,
왼쪽 방엔 손님 하나가 노트북과 씨름 중이었습니다.
저는 두 여인과 멀리 떨어진, 벽에 면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응급실'에 가는 재미 중 하나는 '라디오 스위스'의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대개의 동네 카페에서 들을 수 없는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비 내리는 날 라흐마니노프나 쇼팽의 음악이 나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제가 앉은 자리에서 저만치 왼쪽으로 난
통창 밖 풍경을 보면 저절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느낌이 듭니다.
어제도 그렇게 행복했는데... 창가 자리 두 여인의 대화가
때때로 슬픔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두 사람은 줄곧 시부모 얘기를 했습니다.
각자의 시부모들, 친구들의 시부모들...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손님이 없어서인지 열린 문 밖의 잔잔한 비가 세상의 소음을 지워서인지
그들의 대화는 제게 하는 말인 양 잘 들렸습니다.
먹성 좋은 시아버지, 돈이 있으면서 쓰지 않는 시아버지, 며느리와
의논도 하지 않고 냉장고의 음식을 딸들에게 가져다 주는 시어머니,
병원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면서 돈은 늘 며느리에게 내라고 하는
시어머니...
그들의 대화에 등장하는 시부모들이 안됐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 먹성 좋은 노인. 돈을 쓰지 않는 부자 노인,
며느리와 의논하지 않고 집안에 있는 것으로 선심 쓰는 노인은
제가 보기에도 거슬리는데, 당사자들은 그걸 모르고
며느리들의 스트레스를 초래하니까요.
'어리석은 노인들... 참 안됐다' 하는 생각에 이어
저 며느리들도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부모들이 없었거나 어리석지 않았으면
저 사람들이 가을비 아름다운 날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줄곧 시부모 흉을 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적당한 흉보기는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데 도움을 주지만
너무 오랜 흉보기는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인생의 낭비를 초래합니다.
어제 본 두 며느리들이 '응급실'에 다시 오는 날엔
시부모 흉을 적당히 본 후 '우리는 나이들어도 그들처럼 하지 말자'며
맛있는 커피와 아름다운 음악과 창밖 풍경을 음미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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