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2020년 4월 15일)

divicom 2020. 4. 15. 11:23

요 며칠 메가폰을 들고 오픈카에 탄 사람들이 마스크 쓴 세상을 휘젓고 다니더니 

오늘은 조용합니다. 21대 총선이 치러지는 중입니다. 총선에 출마한 대부분의 국회의원 

후보자들을 보며 정치판의 관성을 생각합니다. 중학교 물상 시간에 뉴턴의 운동법칙을 배우며 

'관성'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는데, 그때는 관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몰랐습니다.


최근에 모 출판사에 글을 써 보내면서 '코로나19'가 우리 사회의 관성을 깨뜨려주기를, 

다시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서 제 글과 이란성 쌍둥이 같은 글을 보았습니다.

사회부 데스크 백승찬 씨의 글입니다.


백승찬 씨와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의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2017년 9월 경향신문의 '책과 삶' 코너에 특정 출판사 책이 너무 많이 소개돼 있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이메일을 보냈는데, 그때 답 메일을 보내준 사람이 당시엔 기자였던 백승찬 씨였습니다.

(http://blog.daum.net/futureishere/2079)

그때 백기자의 성의있는 답변이 좋아 아직도 경향신문을 구독하고 있습니다.


[정동길에서]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백승찬 사회부 데스크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인스타그램 추천 게시물에는 여행 가서 음식 먹는 인증샷이 태반이었다. 팔로어가 수만~수십만명에 달하는 인플루언서들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여행지에 가서 맛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기는 좋은 음식을 사진 찍어 올렸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각종 앱의 때론 화사하고 때론 아련한 필터 기능 덕분에 사진의 효과는 배가됐다. 여행지엔 사진 찍기 좋은 조형물이 놓였고, 식당은 맛보다는 플레이팅에 공을 들였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사용자가 주춤한 사이 급증한 인스타그램 사용자들은 인플루언서들이 다녀간 장소들을 찾아 똑같은 구도의 인증샷을 찍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 흐름에 뒤처지는 것 같았다.

[정동길에서]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스턴트 커피와 설탕, 물을 섞어 수백번씩 휘저어야 하는 달고나 커피,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주인을 반기는 반려동물, 인적 드문 인근 공원을 느긋하게 거니는 모습을 찍어 올린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모임들이 그렇게도 많았다. 같은 학년 학부모 모임, 예전 같은 반 학부모 모임, 지난 직장 동기 모임, 대학 시절 동아리 모임, 사내 소모임 등을 쉴 새 없이 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즐겁고 충만한 감정으로 가득한 모임도 있었지만, 왜 왔는지 알 수 없는, 그러나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쉽게 자리를 뜨기 힘든 모임도 있었다. 속내를 완전히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우리 삶을 통틀어 몇 명 만나기 어렵다. 대부분의 모임에서는 누군가 툭 던진 말 한마디의 속뜻에 뒤늦게 불쾌해하거나, 무심코 꺼낸 대화 소재를 수습하지 못해 난감해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으레 감도는 허영과 시기와 경쟁의 공기에 어느새 진이 빠지기도 했다.

이제 그런 모임은 없다. 어쩌다가 연락이 닿아도 “코로나 끝나면 보자”는 장담할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마친다. 이 말은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문장처럼 ‘약속’이라기보다는 ‘인사’에 가깝다. 혼자 스트리밍 서비스로 드라마 보고, 책 읽고, 인터넷 공간을 떠돌면서 시간을 보낼 뿐이다.

여행과 인간관계 재개되겠지만
과거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아
타인 시선이 아닌 자신의 만족
외양 아닌 본질에 집중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지 모른다


한동안 많은 이들이 ‘인싸’가 되기 위해 안달이었다. 멋진 여행과 음식 사진을 찍어 많은 이들의 ‘좋아요’를 얻어내고, ‘네트워킹’을 한다면서 많은 이들과 관계 맺는 것은 ‘인싸’의 주요 조건 중 하나였다. 이제 그런 ‘인싸’는 없다. 자랑하기 위해 여행하거나 관계를 위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되는 시기가 됐다. 저가항공사와 저가 공유숙소가 늘어나면서 여행객이 폭증하자 세계 각지의 유명 관광지들은 ‘과잉관광’(오버투어리즘)에 신음했다. 환경은 훼손되고 지역 주민은 고통받았다. 코로나19 이후 세상에서 그런 여행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모든 사람은 죽지만, 자신에게는 죽음이 닥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또한 사람이다. 죽음을 잊고 지내던 사람은 큰 병을 진단받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은 뒤에야 죽음을 떠올린다. 지금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던 생활 방식, 삶의 조건을 강제로 되돌아보고 있다.

미국의 작가 수전 케인은 <콰이어트>에서 현대 세계가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이유를 분석했다. 19세기 미국의 개인이 가져야 할 자질은 명예, 도덕성, 예절, 진실성이었지만, 20세기의 개인은 매력, 에너지, 카리스마를 보여줘야 했다. 혼자 있을 때도 단정한 몸가짐을 중시한 ‘인격의 문화’가 타인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신경쓰는 ‘성격의 문화’로 전환됐다. 대학 강의실에서는 홀로 사색하고 탐구하기보다는, 조모임으로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도록 유도한다. 직장 회의실에서는 자기 확신이 강하고 말 잘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쉽게 반영된다. 조모임의 학습 효과, 자기 주장 강한 사람의 일처리 능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한 실험은 아직 없다. 뉴턴, 아인슈타인, 쇼팽, 프루스트, 카프카, 스필버그는 모두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언젠가 코로나19가 잠잠해진다면 다시 여행은 시작되고 관계도 재개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의 여행과 관계는 이전과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해, 외양이 아니라 본질에 집중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살피지 않아도 천도(天道)를 본다. 멀리 갈수록 아는 바는 줄어든다.” 수천년 전 노자의 말이 21세기에 새롭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142108025&code=990100#csidxa7aeb8d219a3f718406ed127c740f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