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은행이나 금융기관에 들어가면
취업 잘했다는 축하를 받지만, 저는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게 축하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금융은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남의 돈의 위치를 옮김으로써 돈을 버는 사업이니
존경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평소 생각이고, 금융 하면 제일 먼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이 떠오릅니다.
게다가 은행에서는 사람의 인격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돈을 빌려 쓸 수 있는 사람인가로 사람을 대우하고,
은행의 직원은 세상 곳곳을 돌다온 '더러운' 돈을 늘 만져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곳에 취업하는 게 축하할 일일까요?
사람보다 자본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그게 무슨 바보 같은 말이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저 하나는 아닐 겁니다.
금융기관을 맹신하는 자본주의 신봉자들이 읽으면 좋을 칼럼을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보았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돈이 많으면 근심도 많으니 가난이 감사한 아침입니다.
[아침을 열며]금융은 사실 사기다
베스트셀러 경제학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2014년 낸 저서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 “은행은 (일종의) 신용사기”라고 썼다. 장 교수가 은행에 무슨 유감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의 논리는 이렇다. 은행은 예금을 한 사람들에게 원하면 언제든지 돈을 찾아갈 수 있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은행은 실제로는 예금 중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현금만 보유하고 있다. 예금주들이 일제히 찾아와 자기 돈을 찾아가려 하면 은행은 그 돈을 다 내줄 수 없다. 사실상 은행이 예금주들에게 ‘거짓’ 약속을 한 것이다. 물론 장 교수가 하고 싶은 진짜 얘기는 그다음에 나온다. 은행의 신용사기는 (잘 운영만 되면) 사회적으로 유익하고, 신용사기야말로 은행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은행의 약속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는가에 따라 그것이 진실이 될 수도, 거짓이 될 수도 있어서다. 은행의 약속을 믿는 예금주가 충분히 많으면 중도에 자기 돈을 찾아가는 이들이 적어 은행은 대출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만들어내고(신용 창출) 경제에 도움이 된다. 반대로 은행을 믿는 예금주의 수가 충분하지 못하면 은행은 기능을 할 수 없다.
장 교수의 얘기는 금융에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를 보여준다. 신뢰를 잃은 은행은 ‘뱅크런’(예금주들의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으로, 신뢰를 잃은 자산운용사는 ‘펀드런’(투자자들의 대규모 펀드 환매 사태)으로 파산할 수밖에 없다.
최근 국내 금융계에서 잇따라 터져나온 해외 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와 라임자산운용 사태는 소비자들의 금융사에 대한 신뢰를 허물고 있다. 각각 최소 수천억원대에서 1조원 이상의 개인투자자 피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금융사들의 각종 불완전판매와 임직원들의 도덕적 해이 의혹이 드러나고 있다. 관련된 은행과 증권사, 자산운용사들은 막대한 손해배상과 임직원들에 대한 금융당국의 징계, 사법처리 위기 등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이런 눈에 보이는 타격보다 더 무서운 것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어 금융사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다.
금융사들이 위기에 이르게 된 데는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데 기반이 됐던 이른바 ‘금융혁신’과 ‘규제완화’가 독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금융혁신과 규제완화 속에 각종 파생결합상품 등 복잡한 금융상품들이 양산됐다. 수학과 통계학, 물리학 등이 결합된 ‘금융공학’을 통해 탄생한 파생금융상품의 구조는 해당 상품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이 상품들을 판매한 금융사의 최고경영자조차 상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파생상품들은 ABS, MBS, CDO, CBO, CLO, CDS 등등 명칭도 어렵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인물에서 따온 태양계 행성과 위성 이름인 ‘플루토’니 ‘테티스’니 하는 라임의 펀드명은 뭔가 신비스럽다. 보통 전문 분야에서 자신들의 속셈을 숨기거나 높은 요금을 정당화할 때 어렵고 그럴듯한 명칭을 사용하려는 유인이 있다. 비전문가들인 소비자들을 명칭에서부터 주눅 들게 만들어 쉽게 현혹시키는 효과다.
파생상품들의 핵심은 여러 채권을 한데 묶고 구조화해 위험을 회피하는 데 있다. 하지만 이들 상품의 기초는 여전히 대출 등 안전하지 못한 자산들이다. 금융사들이 부실한 기초자산(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위험을 교묘하게 숨겨 만든 파생상품으로 투자자들을 꼬드기다 경제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간 것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일찍이 투자의 귀재라는 워런 버핏은 2002년 주주들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파생상품은 금융계의 대량살상무기다. 지금은 잠복해 있지만 치명적인 파괴를 야기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투자자들이 조심해야 한다고들 한다. 라틴어로 ‘캐비앳 엠프토르(Caveat Emptor·구매자가 조심해야 한다)’라 하는 구매자 위험 부담 원칙이다. 하지만 파생상품은 워낙 복잡하다 보니 투자자가 스스로 조심해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쉽지 않다. 투자자의 책임에만 기대서는 안되고 금융당국의 적극적인 규제와 감독이 필요한 이유다.
금융이 발전하지 않았다면 시장경제는 지금처럼 번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이 산업의 혈맥으로서의 기능을 넘어 탐욕의 경지로 넘어간다면 경제 전체에는 비극을 초래한다. 지난 수십년간 세계 곳곳에서 반복된 많은 금융위기가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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