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질문의 힘(2018년 4월 25일)

divicom 2018. 4. 25. 10:53

누군가를 상대로 특강을 할 때면 제일 먼저 '질문'을 강조합니다.

'묻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배울 수 없다'는 신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질문은 멸종 위기에 빠진 생물과 같습니다.

어린이들 중엔 질문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자라면서 질문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한국에 와서 기자들을 만났던 때가 떠오릅니다.

다른 나라 기자들은 서로 질문하려 했지만 한국 기자들 사이에서는 질문이 나오지 않아

오바마가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하라고 재차 독려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나중에

텔레비전으로 보았는데, 전직 기자로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기자는 독자와 국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직업인데다 상대가 미국 대통령인데

어떻게 질문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광화문 교보빌딩 현판에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의 말이 적힌 적이 있습니다.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이다

(In this universe we are given two gifts: the ability to love, and the ability to ask questions.).'입니다. 

올리버의 수필 모음집 <업스트림(Upstream)>에 나오는 말입니다.

'upstream'은 '상류로'를 뜻하는 부사이지만 여기서는 '거슬러 오른다'의 의미로 썼겠지요.


대한항공 사태, 미투운동, 드루킹 사건 등 지금 한국 사회에 쏟아져 나오는 비리의 폭로와 성토는 반갑지만,

이 문제들에 대한 분노와 비판에는 반드시 질문이 수반돼야 합니다.

'피해자들은 왜 그리 오랫동안 침묵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침묵을 강요했을까? 

어떻게 그런 일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을까' 등 공통적이고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그런 질문 없이 지금 이 사회를 휩쓰는 사건들에 접근하고 박수친다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막기 어려울 겁니다.


비와 강풍, 미세먼지까지 떠난 오늘, 위의 질문들은 물론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 건 무엇이고 죽는다는 건 무엇인가 등

잊고 있던 질문을 꺼내보는 분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오늘 경향신문에서 '질문의 힘'에 대해 얘기하는 칼럼을 보았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송혁기의 책상물림]질문의 힘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훌륭한 임금의 대명사인 순(舜)은 큰 지혜를 지닌 인물로 일컬어진다. <중용>에서는 순의 큰 지혜가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질문하기 좋아하고 하찮은 말 하나도 신중히 살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사랑한 제자 안연은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이에게까지 질문하고, 많이 알면서도 조금밖에 모르는 이에게까지 질문한 인물로 기억된다. 공자 자신도 질문을 너무 많이 한다고 무시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묻고 배우는 일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조선 시대 학자 김창협은 숙종을 모시고 경서를 강독하는 자리에서,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 왕을 경계하기 위해 순과 안연을 거론했다. 절실하게 사색하고 빠짐없이 따져보다 보면 의문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잘 알아서가 아니라 의문이 생기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므로 이렇게 매일 강독을 이어가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엄중히 질책하였다. 김창협의 이 말로 인해 숙종은 비로소 전날 강독한 부분에 대해 연달아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우리나라 교실에 질문이 별로 없다는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의미 있는 개선의 시도들이 적잖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에 들어온 우수한 학생들이 질문에는 유독 미숙한 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워낙 잘 만들어진 인터넷 강의를 골라듣는 데에 익숙해진 학생들이어서, 대학 강의가 취향과 필요에 따라 스킵이 되지 않아 불편을 느낀다는 말도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진지하게 경청하고 창의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더 심각한 것은, 질문 없음이 단지 교육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질문은 학습효과를 높이고 소통능력을 기르는 수단을 넘어서, 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과 부속품을 가르는 지점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다시 생각해볼 때 생기는 것이 질문이고,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문학이다. 다가오는 세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우리가 배운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은 세상일 것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배우는가보다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242121005&code=990100#csidxb4964c4cc66c24eaced0fbf0fb3f35f